길은 하나가 아니다

추석

Cmaker 2005. 9. 23. 08:21

추석,

 

한국에서는 추석날 아침이면 아이들 데리고

 

정릉의 장손 사촌형님댁으로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간 탓으로 다소 썰렁한

 

거리를 지나 정릉 골짜기의 사촌 형님댁에 도착하면

 

다른 사촌 형님들도 식구들 모시고 와 있고

 

그동안 밀렸던 얘기들 하면서 차례를 지내고

 

술도 한잔씩 마시고

 

불콰해서

 

집에 돌아와 누워 텔레비젼 보면서 하루를 보냈던 기억들...

 

가끔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모두들 차를 몰고 시골 선산으로 달려가서

 

시골 사는 사촌 형이 깨끗하게 단장해 놓은 조상 산소들을 한 바퀴 돌고

 

사촌형이 담가 놓은 호랑이 술을 들이키며

 

만날 때마다 하던 얘기들 늘어 놓고....

 

어려서는 이럴 때 가면

 

큰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는 큰아버님이, 돌아 가신 후에는

 

사촌 형들이 용돈을 쥐어 주곤 했는데

 

내가 돈을 벌면서 부터는

 

내가 당질들이나 사촌 형수들께 드리곤 하였다.

 

일년에 딱 두번 정월 초하루, 추석

 

그동안 돈을 잘 번 사촌들은 얼굴도 좋아지고

 

자동차도 좋은 차로 바뀌고

 

신수가 훤해져서 오고

 

잘 안 풀리게 되면 풀이 죽어 있고..

 

나와 여동생은

 

고등학교 교사 생활 했으니까

 

늘, 변화없는 생활이였고..

 

남 동생 둘은 모두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 군인이었으니까

 

동생들도 꾸준한 편이였다.

 

우리집 형제들은 큰 변화가 없었는데

 

사촌 형 다섯은 그 변화가 무쌍하였다.

 

구체적으로 열거하기에는 너무나도 소설같은 이야기들이라 접도록 하고

 

이곳 미국에서의 추석 모습을 얘기해 볼까 한다.

 

어느 때처럼(일년에 두 차례, 정월 초하루/추석)

 

아내는 새벽에 일어나 차례 준비를 해서

 

상을 딱 차려 놓고 나를 깨운다.

 

다른 날은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는 편인데 이상하게 명절때는 늦게 일어나게 된다.

왠지 그 이유는 모름

 

지난 번까지는 작은 아이들은 빼고 차례를 지냈는데 이번에는 아이들도 깨웠다.

 

시집간 딸은 부르지도 않았지만 오지도 않았다.

 

현관 문을 조금 열어 놓고 어머니 영정 앞에 향불을 피고 촛불도 밝히고

 

잠시 후에 할머니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을 물어 보았다.

 

지금 8살이 된 막내와 11월에 10살이 될 딸아이의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을 들어보면서 -어머니는 1999년 11월 16일에 돌아가셨음-

 

아이들의 기억이란 것이 자신들의 안에 기억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후에 해준 얘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2005년 9월에 8살짜리가 어떻게 1999년의 일을 기억하겠는가라는 의문때문이다.

 

아무튼 희미하게 할머니에 대한 단상을 뭐라고 아이들 나름대로 얘기하였고

 

난 늘 하는 얘기

 

어머니께서는 날 당신의 최고 아들로 여기셨다는- 장남 최고-

 

그리곤 어머니께 절하고 술잔을 따라 드리고

 

차례를 마치고

 

아이들과 국에 밥을 말아 김에 싸먹으면서

 

외국에 살면서도 고국의 방식대로 사는 우리들이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맞이했던 첫 정월 초하루(2000년)

 

아내는 아무런 얘기도 없이 차례상을 준비했다.

 

상을 다 차려 놓고 식구들을 깨웠다.

 

차례를 지내며

 

어찌나 아내가 이쁘고 자랑스럽던지.....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을까?

 

한국의 동생들이 성당에서 따로 지내고 있기 때문에 따로 모실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맏며느리로써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우리의 방식대로 준비했으리라....

 

올해

 

아내는 직원들에게 배 한 상자씩 돌렸고

 

떡을 해다 놓고

 

아침에 간단하게 요기하게 했으며

 

옆 사무실 등에도 떡을 돌렸다.

 

이렇게 2005년 추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