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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친구  새소리에 잠이 깼다. 맑고 투명하다. 어제 친구의 목소리도 저렇게 청명하게 들렸다. 친구는 대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목소리만큼은 예전과 다름없이 쾌활했다. 친구는 치료를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 싸움의 첫째는 잘 먹는 것이고 둘째는 잘 자는 것인데, 자신은 먹는 것과의 싸움은 그런대로 잘 견디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잠을 못 잔다고 했다. 하루에 한두 시간도 잘까 말까하다는 것이다.  건강한 친구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키가 크고 체격도 컸다. 교실 맨 뒤에 앉아 있었다. 급우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고 별로 말이 없었다. 워낙 덩치가 커서 함부로 다가가서 뭐라고 말붙이기도 힘들었다. 그맘때는 무엇이든지 크기로 가늠하지 않았던가. 6학년 때 한 반이었던 것 말고는 ..

친구 2024.06.22

석양에 서서- 아버지날을 맞이하며

한 노인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낯설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친숙한 얼굴도 아니다. 세월의 풍파가 가득 담긴 얼굴을 살펴본다. 초점이 없는 희미한 눈동자, 축 처진 눈 밑의 살, 눈에는 눈곱도 껴있다. 움푹 파인 양 눈, 그 가장자리의 까마귀 발자국, 하얗게 서리 내린 귀밑 머리카락, 삐죽삐죽 자라난 뻣뻣한 수염,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 까맣고 하얀 것들이 뒤섞여 있다. 오늘도 거울 속의 아버지는 거울 밖의 내게 한 말씀 하셨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말씀-저녁 무렵 공원을 찾았다. 거의 매일 아침 걷는 공원이지만 해질녘에 찾기는 처음이었다. 한낮의 더위는 식어가고 있었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있었다. 하늘 저편이 점차 붉은 빛을 띠..

인생살이 2024.06.14

암,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다

20여 년 전부터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고 지내는 후배 부부와 만나 점심을 함께했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후배이기에 올해 무슨 좋은 계획이 있는가 물었다. 후배는 잠시 주춤하더니 올해는 예년처럼 여행을 많이 다니지는 못할 것 같다며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했다. 현재 암세포가 발견된 상태라면서 자세한 암의 정도는 며칠 뒤에 하기로 한 정밀 검사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후배는 주로 남성들에게 발병하는 암으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나의 선친께서도 같은 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완치 판정을 받았고, 그 후로도 십수 년을 더 사셨기에 얼마든지 완쾌가 가능하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집으로 돌아와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가 검사한다는 날 이후로 혹시 연락을 하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그는..

기본 2024.01.26

혁신위원회

12월에 들어선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순이다. 백화점들의 장식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한 지 오래 되었고 라디오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롤이 하루 종일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연말연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한국 정치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있다. 필자와 자주 만나는 어르신들은 정치 이야기를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를 어찌 할 수는 없다. 한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맥도날드나 파네라 등의 다른 테이블에서 들리는 소리를 제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신문이나 라디오, TV 등을 비롯해 유투버들이 하는 얘기를 옮기고 있다. 서로 언성을 높이며 뜨거운 토론을 벌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목소리 큰 한 사람이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입 다물고 듣는 ..

기본 2023.12.06

그럴 리가 없다

요즈음 대한민국은 지방 한 도시시장을 거쳐, 도지사를 지낸 후에 대통령에 출마해 0.7%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낙선한 분의 재판으로 시끄럽다. 그는 대선에 실패한 뒤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거대 야당 대표가 되었다. 그가 재판에 회부된 것은 시장, 도지사 재임 중에 있었던 여러가지 불법 혐의 때문이다. 그 많은 혐의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다. 오늘은 그 중 가장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는, 그래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그 분이 도지사로 재임할 때는 도지사 공관 행사 등 명목으로 대량의 샌드위치와 과일 등을 종류별로 구입한 뒤 법인카드로 결재한 후 도지사 자택으로 정기적으로 배달시켰다고 한다. 한 번에 적게는 10인분, 많게는 30인분 정도가 배달됐다고 ..

기본 2023.10.27

단식투쟁

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극명하게 편을 나눠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툰다. 오직 적 아니면 내 편이요, 내 편 아니면 적이다. 직장에서도, 친목 모임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다. 이런 세상이다 보니 정말 조심해야 한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집단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고 적으로 간주되어 집중 공격을 받기도 한다. 박근혜 씨가 대통령으로 출마한다고 할 때 '박근혜 씨는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다'고 칼럼에 썼다가 집중 포화를 받은 적이 있다. 전화로 심하게 나무라는 분도 있었고, 초등학교 동창생 한 명은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냐고 몹시 실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타운뉴스로 찾아와서 ‘당신은 좌파냐’고 신랄하게 퍼붓고 가는 분도 있었다. 그 뒤로 정치나 시..

기본 2023.09.01

일요산행

유리가 내게 물었다. 생일 선물로 무엇을 원하는가? 내게 무엇이 필요할까? 랩탑을 원한다고 하자 유리는 아빠는 글쓰는 것 말고 특별히 하는 것도 없으면서 랩탑을 새 것으로 장만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다. 그럼 전화기를 새 것으로 할까? 유리가 말했다. 아빠 전화기 13인데 뭘 또 새 것으로 하려냐고 물었다. 14가 나왔으니까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되물으니 곧 15가 나올테니 그 때 바꾸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다음날 등산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토요일(8/26) 유리가 등산화를 사러 가자고 했다. 자기도 11월에 히말라야에 가는데 새 등산화를 장만하겠다고 했다. 나는 2017년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2018년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에 갈 때 신었던 그 등산화를 다시 살..

2023 산림축제

2023 산림축제 지난 8월 19일(토) ‘2023 산림축제(Forest Festival)’가(이) 열렸다. 산골고니오 야생 협회(San Gorgonio Wildness Association, SGWA)가 주최하는 산림축제는 해마다 8월 세 번째 토요일에 Barton Flats Visitor Center에서 열린다. 2015년 산불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재개됐다가 코로나 19로 또 다시 중단됐고, 작년에 다시 재개됐으나 필자는 참석하지 못했다. 올해 개최 연락을 받고 갈까 말까 망설였다. 집에서 축제장까지 편도 두 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림축제 개최 소식을 듣자마자 떠오른 테디 보스톤(Teddi Boston)이 보고 싶어 결국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테디는 1976년 패시픽 크레스트..

카테고리 없음 2023.08.22

랄프 공원에 울려 퍼진 광복절 노래

랄프 공원에 울려 퍼진 광복절 노래 이역만리(異域萬里) 고국을 떠나 살면서 고국과 관련해 감격에 겨워 가슴 뭉클함을 느끼는 순간은 흔치 않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아침, 감동과 감격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매일 아침 8시 부에나파크시 Gilbert St.과 Beach Blvd. 사이 Rosecrans Ave. 선상에 있는 랄프 레저널 파크(Ralph B. Clark Regional Park)에서 60~70여 명이 모여 함께 체조를 한다. 평균연령이 80대 초반 정도 되니까 90을 넘긴 분들이 몇 분 계시고 80대 후반을 달리는 분들도 적지 않다.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외국인들도 10여 분 있다. 그 체조팀에서 광복절이던 지난 15일 체조를 마치고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작년 ..

기본 2023.08.22

새만금 잼버리 유감

새만금 잼버리 유감 지난 9일, 서울의 친지들 몇 분이 백화점, 올림픽 공원, 조계사, 덕수궁, 경복궁 등지에서 외국 스카우트 대원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사진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8월 1일 시작한 월드 잼버리가 12일 끝나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대원들이 중간에 야영장을 나와 서울 근교로 흩어져서 야영 대신 도시 관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집행부가 판단을 잘 했다. 35-6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그늘 하나 없는 곳에서 무리하게 야영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훌륭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야영 생활보다는 도시 관광이 훨씬 더 재미있고 유익하다. 야영이야 어디서 하든 비슷비슷하지 않은가? 단지 다른 나라에서 온 나와 모습이 다른 또래의 대원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재미가 더 있을 뿐이다. ..

기본 202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