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인연을 맺으며 산다. 학창시절에 만났던 훌륭한 선생님들을 기억하면 지금도 머리가 숙여지고 옷깃을 여미게 된다.
미국에서 만나 사제의 인연을 갖게 된 분이 있다. 그 분과 함께 한 시간은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자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기에 스승이라 부름을 주저하지 않는다.
LA에서 십여 명이 모여 글공부를 했었다. 자신이 써온 글을 낭독하고 참석자들이 각자의 느낌을 말하면 선생님이 이를 종합하여 당신의 생각을 알려주는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인문학적인 강의를 하는 그런 교실이었다. 직유보다는 은유를, 글의 겉에 들어난 의미보다는 속뜻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마지막 강의에서 선생님은 당신의 꿈을 밝혔다. 인문학을 강의하는 작은 대학을 만들겠노라고 하면서 대학 설립 추진을 위해 몇몇 사람들을 실무위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다음해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11개월이 되었으나 제자들은 여전히 교실에 모여 공부하고 있다. LA 인근에 그의 제자들이 열고 있는 글공부 교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 뿐 아니다. 미주 문단에 그가 남긴 유산은 도처에 남아 있다. 매년 그가 남긴 문학지, 문학세계가 발간되고 있으며 그의 뜻을 기려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매년 1명의 당선자를 뽑아 시상하고 있다. 스승의 꿈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하나의 열매로 맺어질 것을 의심치 않는다.
스승의 공덕을 칭송하는 공덕비는 세우지 못할망정 그분을 기리는 시비를 건립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스승의 고향,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를 찾았다. 이장을 만났고 학산면을 방문했으며 영동군청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들로부터 많은 조언을 들으며 일의 진행 방향을 설정하고 추진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영동군청에 보낼 협조 공문을 작성하면서 선생님에 관한 놀라운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선생님이 1960년대에 쓴 시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읽히고 있었다. 인터넷에 선생님의 대표적인 시 중에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은 멀고’를 치니 블로그나 카페 등에 사람들이 올린 ‘오늘은 멀고’가 화면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스승으로 모시면서 1년여를 공부했으면서도 그분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닮고 배우려고만 했지 그분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돌아가신지 10주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스승의 시를 면밀히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승은 꿈을 중요시했다. 언제나 꿈꾸며 살았다. 그러하기에 80이 되어서도 꿈을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그가 꿈꾸며 키워온 인문학 대학,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종강하며 제자들에게 그 계획을 밝히며 다음해에 적극적으로 추진하자고 담담히 말했다. 그의 눈빛은 의지와 희망이 담겨져 있었고, 제자들은 스승의 뜻에 받들어 적극 동참할 것을 다짐했다.
그는 ‘오늘은 멀고’라는 시속에서도 꿈을 얘기했다. 어제, 오늘, 내일 중에서 오늘이 가장 가까이 있다. 오늘은 지금 내게 와 있는 시간이고, 어제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내일은 앞으로 닥쳐올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은 멀고’라고 했을까?
지금 여기 내 곁에 와있는 오늘이 고달프고 힘들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은 ‘힘들고’라고 해야 하는데 ‘멀고’라는 표현을 썼다. 어제가 멀리 있다고 하지만 이미 경험해버렸고, 내일이 앞으로 닥쳐올 시간이긴 하지만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지나가 버린 시간과 닥쳐올 시간들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지금 내게 와 있는 오늘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꿈을 꾸면서도 결코 허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무, 그리고 내일로 향하는 의지!
이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박대통령의 탄핵이 이루어졌다. 한명이 투표에 참석하지 않고 234명이 찬성, 56명이 반대, 7명의 표가 무효였다며 이를 숫자로 나열하면 1234567이라고 한다. 앞으로 만사가 일사천리로 잘 진행될 것이라는 우리의 꿈이 숫자로 표현된 것일까?
2016년이 서둘러 떠나려 하고 있다. 허망한 꿈들이 세상을 흔들고 있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이라 했던가. 꿈은 아름다운 것이라고도 했다. 또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도 했다. 과연 그런가? 꿈은 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기도 한다. 12월, 꿈이 깨어진 자들의 허망이 허공을 떠돌고 있다.
스승의 시비가 예정대로 2018년 1월 당신의 10주기에 고향 땅에 우뚝 솟아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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