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149

목욕탕에서 만난 5·18

동네 목욕탕에 갔다. TV 소리가 크게 들렸다. 두 사람이 흘끔 나를 쳐다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사람은 이발의자에 앉았고, 다른 한 사람은 좀 떨어져 TV를 향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큰 소리를 내었다. 이발사와 세신사로 추정되는 두 사람은 제42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실황 중계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옷장을 열고 옷을 벗어 넣으며 그들의 다투는 듯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5·18 광주사태'를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일으킨 만행이라며 힘을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광주사태가 아니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이고, 독재에 항거한 시민운동이..

기본 2022.05.19

삶의 선택

삶의 선택 얼마 전 베트남의 한 학생이 자신을 감시하는 아버지 앞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아버지는 새벽 3시 34분 아이를 깨워 왜 여태 숙제를 하지 않았냐며 지금 당장 하라고 했다. 아들이 책상 앞에 가만히 서 있자, 아버지는 계속 잔소리했다. 아들은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들은 "아빠, 내 노트를 봐"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노트에 적힌 글을 읽는 동안 아들은 베란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의자에 올라가 난간 아래로 몸을 던졌다. 아버지에게 읽어보라고 한 글은 아들의 유서였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 베란다로 달려갔지만, 아들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집은 28층이었다. 아들의 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나의 행동과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해 죄송하다. 정말이지 인생..

기본 2022.04.04

다시 산으로

비가 한바탕 쏟아진 며칠 뒤 산에 올랐다. 한때 두 친구와 매주 찾던 바로 그 산이다. 그때 산을 오르며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대단한 약속은 아니었다. 셋이 함께 히말라야에 다녀오자는,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그런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주말산행이 10여 년 잘 지속되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흐지부지 되었고 히말라야에는 나 혼자 다녀오게 되었다. 친구들과 산에 다니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SGWA(San Gorgonio Wildness Association)이라는 단체에 가입해서 레인저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 레인저가 되어 여전히 주말이면 산에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리고 2017년, 2018년 히말라야를 찾았다. 히말라야 산봉우리,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기본 2022.04.01

붉은 눈동자, 굽어진 부리, 펼친 양 날개, 득의에 차서 훨훨 날아 사해를 지나네

어릴적 친구 기평 손영락 화백은 내게 이 그림을 선물했다. 1990년 터널과 같은 어둠 속을 힘들게 지날 때였다. "독수리처럼 용맹스러운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냐?”며 “사해(四海)를 돌아 휘몰아치라!”고 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 기평의 그림 한 점이 내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고 힘이 되었던가. 창공을 나는 독수리 한 마리, 그 독수리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25년이 지났어도 그림 속의 독수리는 날카로운 발톱과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날고 있다. 그림 속의 글자 내용은 다음과 같다. 赤眸曲喙兩伸翼 得意飛飛過四海 (적모곡훼량신익 득의비비과사해) 붉은 눈동자, 굽어진 부리, 펼친 양 날개, 득의에 차서 훨훨 날아 사해를 지나네. 歲在庚午之冬 道峰山墨香軒人 玄江 (세..

기본 2022.03.19

동백 예찬

지난해 가을, 타운뉴스 앞뜰에 자동차가 진입하여 잘 자라던 알로에 두 그루와 국화 한 그루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앞뜰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담장도 무너지고 잔디도 상당 부분 훼손된 사고였다. 담장 수리를 끝내자마자 화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란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녀석들이 다 시들고 잎과 줄기에 작은 벌레가 하얗게 앉아 볼품없던 유채(혹은 갓)들을 모두 뽑아 버렸다. 장미와 국화 등의 시든 꽃과 누렇게 변색된 잎도 따주었다. 빈 공간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다가 겨울에 피는 동백이 보고 싶어 동백나무 심기로 했다. Home Depot에서 동백을 사다 심었다. 처음에 한 그루만 사다 심었는데 외로워 보여 다음날 한 그루를 더 사다 심었다. 열심히 물을 주고 출퇴근 할 때마다 돌보기 시작..

기본 2022.03.18

박수갈채 받으며 떠나는 대통령 보고 싶다

한국 대통령선거 다음날 아침, 단톡방에서 한 친구가 물었다. 누가 당선되었냐고. 그러자 한 친구가 대답했다. 이재명이라고. 잠들기 전 '이재명 후보가 득표수에서 앞선다고 했는데 그대로 굳혀서 이후보가 당선되었구나' 생각하면서 SNS에 들어가 보니 윤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보도가 뜨고 있었다. 친구도 이재명 후보가 앞설 때 보고는 다시 자고 일어나 정확한 보도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득표율 0.73% 포인트 앞서서 승리했다. 윤 당선인은 1,639만4,815표(48.56%), 이재명 후보는 1,614만7,738표(47.83%)를 얻었다. 차이는 24만 7,077표. 이런 득표수는 양측 지지자들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투표에 나선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번 ..

기본 2022.03.12

코로나 시대 체중 관리

코로나 시대 체중 관리 친구 둘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셋이 모인 것은 꽤 오랜 만이다. 친구들은 살이 쏙 빠져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배가 불룩 나오고 얼굴도 제법 통통했었는데, 배는 홀쭉해졌고 얼굴도 갸름해 보일 정도였다. 한 친구에게 ‘보기 좋다’면서 ‘살을 얼마나 뺐는가’ 물으니 20파운드쯤 감량했다면서 전문가의 지도하에 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술을 1월 18일부터 끊었노라고 했다. 히말라야에서도 매일 저녁 술을 마셨던 친구다. 고산증으로 힘들어 하며 누워있는 사람 옆에서도, 산소호흡기 끼고 있는 사람 곁에서도 그는 술을 마셨다. 그러던 그가 술을 끊었다니 건강을 위해 큰 결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친구는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했다. 주말이면 축구모임에서 공을 차고 주중에는 하루에 한..

기본 2022.03.04

우크라이나 사태가 주는 교훈

2022년 2월 21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 반군 세력들이 독립을 선포했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2개의 독립국가(도네트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가 탄생(?)했다. 유엔과 우크라이나,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즉각 승인하고 그 지역 '평화 유지를 위해 특별군사작전'을 수행한다면서 전투 병력을 투입했다. 러시아군은 이틀 만에 우크라이나의 83개 軍시설과 공항 등을 파괴했고, 체르노빌을 점령했으며, 수도 키예프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다. 2월 25일 현재 우크라이나인 137명이 사망하고 31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우크라이나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유엔 안정보장이사회에 러시아를 제어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5개 상임이사국 중 ..

기본 2022.02.24

고 이원희 박사의 명복을 빈다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한 분이 지난 4일 유명을 달리했다. 1978년 7월에 대원고등학교의 설립자 교장과 교사로 만났다. 1993년 2월까지 14년 7개월(25살에 만나 40살까지)을 함께했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그 분과 나의 이야기는 사나흘 밤을 새우며 얘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만났던 2020년 6월 13일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토요일이었다. 2주 후에 타운뉴스 새 사옥으로 이전하기 위해 주말임에도 회사에 나와 짐을 싸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그 분이었다. "안 선생, 오랜만입니다." 한 마디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미국에 사는 딸네 가족과 식사 도중에 내가 생각나서 전화했다며 시간이 되..

기본 2022.02.04

동지 팥죽

동지 팥죽 22일은 동지(冬至)다. 24절기 가운데 스물두 번째로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하지로부터 차츰 길어지던 밤이 이날 극에 이른다. ‘동지 지나 열흘이면 노루 꼬리만큼 해가 길어진다.’, ‘동지 지나 열흘이면 소가 누울 자리만큼 해가 길어진다.’ 옛 어른들이 하던 말씀이다. 낮밤의 길이가 짧아지고 길어지는 이치에도 위대한 섭리가 담겨있다. 밤이 길어지는 것은 그만큼 휴식을 취하라는 뜻이고, 낮이 길어지는 것은 노동시간을 늘리라는 것 아닌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농사 일로 하루를 보내던 농경사회에서 동지가 지나서부터는 해가 길어지는 시간만큼 더 열심히 일하자는 것이리라.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불 밝히고 일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 밤낮의 길이가 무슨 상관이냐면 할 말이 없다..

기본 2021.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