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이다. 4일이 입춘이고 5일이 설날이다. 입춘은 한 해를 여는 첫 번째 절기이고, 설날은 한 해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는 최고의 명절이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온 사람들은 절기는 잊고 살아도 설과 추석 등의 명절은 기억한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설날과 추석에는 먹을 것이 풍성했다. 고깃국에 밥 말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무엇보다도 일가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기쁨도 빼놓을 수 없었다. 똑 같이 반복되는 차례에다가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도 거의 같은 이야기요 앞뒤 순서만 바뀌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그날을 기다렸다. 무언가 집안의 내력, 감춰진 이야기들이 가끔씩 터져 나오기도 했다. 증조부를 명당에 안치시키기 위해 남의 산에 야밤에 들어가 묏자리를 만들고 산소로 쓴 후에 산 주인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는 이야기, 아버지가 해군에 입대한 후에 해병대 1기생이 되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고향에 돌아와 큰아버지를 괴롭혔던 동네 빨갱이들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잡아다가 경찰에 넘겼다는 대목에서는 숨이 차오르기도 했다.
과장하기 좋아하는 일가친척들에 의해 완전히 전설로 자리잡은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차례상 준비가 끝난다. 큰아버지가 가운데 서고 장손 형이 그 옆에 선다. 그리고 둘째 큰아버지, 아버지가 서고 사촌들이 주욱 서고 나와 동생들이 서서 큰아버지가 엎드릴 때마다 따라서 엎드리고 일어설 때 따라 일어선다. 정성스럽게 빚은 약주를 따라 올리고 수저가 밥그릇에 꽂혔다가 국그릇으로 옮겨 다닌다. 젖가락이 상위에 두들겨서 나란히 세워진 다음에 전위에 얹어졌다가 병어 삶은 것 위에 놓여지기도 하고 나물과 고기 산적위를 오가기도 한다. 조부 증조부 고조부들을 차례대로 모셔다가 절을 한다. 생전 뵙기는 커녕 사진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들께 인사한다.
차례가 끝나고 여러 개의 밥상이 올라온다. 어른들이 한 상에 앉고 그 다음 사촌들끼리 둘러 앉는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늘 만나던 친구보다 더 반갑고 즐겁다. 어릴 때는 아버지 따라 완행열차를 타고 예산까지 가서 버스로 갈아타고 청양으로 갔다. 그리고 또 사양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사양이라는 말이 좋지 않다고 언젠가부터 남양으로 바꿔 부른다. 그 남양에서 내려 30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충청남도 청양군 사양면 매곡리 1구. 시골서 부르는 동네 이름은 메기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손 형은 서울로 이사했다. 장손 형이 서울로 이사한 뒤로는 장손 형 댁에서 차례를 지냈다. 차례를 마친 후에 선산까지 달려가 성묘하고 돌아왔다. 사촌 형들이 자동차가 있어 삼삼오오 나누어 타고 다녀왔다. 1988년 나도 현대 엑셀의 주인이 된 뒤로는 내차도 한 몫했다. 1993년 3월 3일 미국으로 이주한 뒤로는 차례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만 보낸다. 동생들에 의하면 이제는 장손인 당질 집에서 차례를 지내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장손이 자기 형제들과 식구들하고만 지낸다고 했다.
1999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여동생이 다니는 성당에서 합동위령미사를 올리고 있고, 2017년 9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동생이 다니는 성당에서 합동위령미사로 대신하고 있다. 앞으로 차례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모르지만 성당 신자들이 함께 합동으로 위령미사를 드리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글을 시작할 때는 설날이 며칠 남았었는데 글을 마치는 지금은 어제가 설날이었다.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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