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여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대만 내셔널 잼버리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에서 지원한 보이스카우트 대원 30여명과 인솔 지도자 4명이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당시는 해외여행을 가려면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 왼쪽으로 있었던 반공센터라는 곳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해외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고, 심지어 여행지에서 만나는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교육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식적인 교육이었다. 그저 반공 정신을 주입시키고 나라가 국민을 믿지 못해 혹시 대한민국에 대해 비방하거나 잘못된 언사를 사용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까 두려운 마음에 하는 교육이었다. 좀더 노골적인 표현을 하자면 대한민국 정부가 해외 여행중에 국민들이 북한으로 탈출할까 두려워서 하는 사상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반공교육을 이수했다는 확인서를 제출해야 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얘기하려는 주제와는 동떨어진 얘기를 길게 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이때 인솔단장으로 간 분이 서울시내의 모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었다. 이 분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보름 가까이 하는 잼버리 기간 중에는 한 텐트에서 생활했고, 여행 중에는 거의 대부분을 그 분과 함께 방을 썼고 이동중에는 버스에서도 함께 앉았다. 그러다 보니 그 분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 말이었던 나는 40대초나 30대 말이었을 걸로 추정되는 그 분과 생활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그가 너무나 많은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지병이 있어 약을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잠이 안 온다고 수면제를 먹었고, 머리가 아프다고 두통약을 먹었다. 또 소화가 안 된다고 소화제를 먹었으며 팔다리가 아프고 쑤신다고 약을 먹었으니 하루에 적어도 서너 번은 약을 먹었다. 아예 약을 한 보따리 갖고 다녔으며 수시로 손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다. 야영장에서도 버스안에서도 여행지의 호텔에서도 그는 약을 먹었다. 가끔 너무 많이 먹어 배가 거북하다고 하면 내게도 소화제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손사래치는 내게 먹으면 당장 속이 편해지는데 왜 먹지 않느냐고 강요하다시피했으나 나는 먹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약을 지극히 싫어하는 내게 그의 행동은 몹시 낯설었다.
그에게 물었다. 약을 그렇게 많이 복용해도 괜찮은가. 그에게 들은 얘기는 끔찍했다. 그의 부인이 약사인데 집과 약국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손만 뻗으면 약을 집을 수 있어 몸에 조금만 이상이 있으면 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이라는 것이 병을 고치려고 만든 것이니 이상이 있을 때 먹으면 당장 효과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지난 가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도 지금 내 나이 때는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70대에 들어서서 약을 하나 둘 복용하기 시작했다. 신체에 이상이 조금씩 생기면서 어쩔 수 없었을 걸로 생각된다. 이런 저런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더니 80대에 들어서는 하루에 스무알 이상 되는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약을 집으로 직접 배달해주는 분이 있어 약국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약을 받고 계셨다. 배달해줄 때마다 약 한 종류에 1달러씩만 주면 된다. 아버지는 약먹을 시간에 맞춰 제 때에 꼬박꼬박 약을 챙겨 드셨다. 물론 약을 복용하기 위해 식사도 규칙적으로 했다. 약을 먹기 위해 식사를 챙기는 듯 싶을 정도였다. 한 번은 아버지에게 약을 좀 줄여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의사가 다 알아서 처방해준 것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병을 고치겠냐며 내 얘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 번은 의사를 만나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모두 다 보이면서 이렇게 많이 드셔도 괜찮은가 물으니 몇 가지 약들을 줄일 필요가 있다면서 몇가지 약은 한 알을 다 들지 마시고 반알 정도만 복용하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왜 반 알만 먹냐고 한 알을 다 드셨다. 그리고 약이 없으면 불안해 했다. 약먹을 시간을 놓칠까봐 불안해 했고 자신이 건망증 때문에 약먹는 것을 잊어버릴까 걱정했다.
약을 많이 복용한 탓인지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 가장 오래 사셨다. 큰아버지 두 분이 60세, 48세에 세상을 떠나셨고 고모 두 분도 70이 되기 전에 운명하셨다. 아버지는 89, 한국 나이 90에 돌아가셨으니 어찌 보면 의사가 처방한 약을 제때에 시간 맞춰 복용해서 오래 사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나 난 가능한한 약을 먹지 않을 생각이다.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더라도.
1982 대만 내셔널 잼버리에 참가하고 보름 가까이 함께 생활했던 단장님 이름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분이 궁금하다. 지금도 약을 수시 복용하며 생활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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