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 27분, 신부님이 오실 때가 다 되었다. 이를 닦기로 했다. 부지런히 치카치카하고 나오니 신부님이 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다. 신부님에게 이메일 보내고 2시간만에 전화를 받았고, 3시간 만에 아버지 병실로 달려오신 거다. 역시 신부님, 신부님, 우리의 신부님이다.
신부님과 의식이 끝나자마자 호스피스 닥터가 왔다. 그녀는 아버지를 고통없이 편안하게 보내드리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질문이 있냐고 물었다. 평소에 질문을 별로 하지 않는 나였지만 궁금한 게 꼭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눈을 뜨지 않고 잠만 주무시는데 언제 한 번쯤 눈을 뜨고 의식이 돌아올 때가 있는가? 아직 작별인사를 못해서 그런다."
그녀가 말했다.
"지금 눈을 감고 의식이 없는 듯 보이지만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얼마든지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라. 다 듣고 있다. 자 봐라." 하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뭐라 말하니까 아버지의 표정이 바뀌고 있었다. 아버지의 영혼은 아직 멀쩡하다며 영혼의 교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그녀가 신부님 앞에서 영혼을 얘기했다. 그때 신부님은 허허 웃고 있었다.
나도 그녀처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멋지게 사셨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사셨지요. 대한민국의 해군, 해병대로 군번이 두 개씩이나 되고, 인천상륙 작전에 참여하셔서 조국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키는데 한 몫하셨고, 경찰관, 세관원 등의 공직을 거쳐 멋진 여인 만나 아들 셋, 딸 하나 낳았으며 자식들이 모두 잘 살고 있고, 손주들도 열하나나 되고 상처하고, 7년만인 일흔 여덟살에 새장가도 가셨고, 훌륭하게 사셨습니다."
"You are great! I am proud of you."
아버지의 표정이 환해지셨다. 그리고 손의 움직임이 느껴지고 눈꺼풀을 열고 눈을 뜨려는 노력이 감지되었다. 역시 우리 아버지다.
의사와 신부님은 가시고, 혼자 남아 계속 아버지에게 얘기했다.
아버지, 참 많이 때리셨습니다. 무지무지하게 맞았지요. 워낙 못되게 굴었던지라 그랬을 겁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가출을 밥 먹듯이 했고, 어머니가 놀지 말라는 학교 다니지 않는 서너 살 위의 건달들과 어울리고, 하라는 공부는 뒷전이었고. 맞을 짓을 골라가며 했으니까요.
고 1때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사촌형을 주려고 레코드판을 하나 사서 예쁘게 포장해서 두었는데 어머니가 포장지를 풀고 들으셨지요. 그걸 알고 몹시 화를 내었더니 퇴근후 돌아오신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자고 있는 나를 깨워 혼을 내시려고 했지요. 몹시 화가 나있던 나는 잠결에 야단치려는 아버지께 달려들어 아버지를 넘어뜨리고 가출했었지요. 그리고 독서실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녔고, 몇 달 뒤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통해 연락했지요. 만나자고. 우린 신설동 노타리 빵집에서 만났지요. 사나이대 사나이로. 아버지는 그날 시계를 제게 주시며 “이제 그만 집에 들어와라.” 딱 한 마디하고 가셨지요.
역시 고 1때 미아리 동네 양아치들과 싸우다가 도끼로 이마를 살짝 내리쳐 일이 벌어졌을 때 수습을 사촌형이 하고 아버지는 뒤에서 보고 받으셨음에도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넘어가셨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가 쫓겨나서 돌아오던 새벽, 잠에서 깨어 놀라시던 표정, 잊히지 않습니다. 그날 아버지의 표정이 제겐 큰 힘이 되었지요. “뭐 그까짓 해군사관학교가 대수냐며 대학가서 열심히 하면 되지.”
그리고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고, 입학하자마자 동대문 모 양복점으로 데리고 가서 양복을 한 벌 맞춰주셨지요. 까만 양복을 골랐지요. 그리고 리바이스 바지 세 벌을 사다 주셨지요. 하얀색, 베지색, 연한 카키색.
대학 2학년 여름방학에 홍도에서 만났던 4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에도 세상사람 모두가 반대하던 그때에도 아버지는
“네가 고른 여자면 술집 여자도 괜찮다. 그러나 모든 것을 때가 있는데 네가 철학을 전공했으면 대학원도 가야하는데 학업 도중에 결혼을 해서는 힘들지 않겠느냐? 좀 더 기다렸다 결혼식을 하는 게 어떻겠는가?”
그러나 한남동 성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결혼식을 강행했고, 아이 둘을 낳고 잘 살았지요. 미국 유학중이 큰아들이 연달아 사고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손자를 돌보겠다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손자와 손녀 돌보며 1년을 지내셨고, 도저히 아버지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치게 되어 결국 제가 들어왔지요. 그놈도 지금 나이가 마흔 두 살입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아이들 공부하고 있는 미국으로 들어올 때도 한국에 남겨둔 집을 팔고 가구들을 정리할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처리해주셨지요.
미국에서 다시 결혼하고 자리 잡기 위해 발버둥칠 때 아버지가 오셔서 이것저것 큰 도움이 되셨고,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생활하실 때도 하나에서 열까지 다 보살펴주셔서 발병후에 5년여를 더 살다가 편안하게 가실 수 있게 해주셨지요.
아버지!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가십시오. 뒷일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참 한 가지 빼놓은 게 있네요. 아버지, 초등학교 5학년 가을, 비원에 글짓기 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지요.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갔었지요. 그때 아버지가 오셨었습니다. 비원에 있는 밤나무들을 다 발로 몇 번씩 차면 떨어지는 밤송이를 까면서 제게 말씀하셨지요. 밤을 깔 때는 양발로 밤송이를 밟고 요 배꼽을 나무로 살짝 누르면서 양발에 힘을 주면 된다고. 그때 밤따느라고 정신이 팔려 글은 어떻게 썼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글짓기 때회가 중요한가요. 아버지와 밤따는게 중요하지요.
아버지가 그날 들고 오셨던 검은 가죽 서류가방이 생각납니다. 올 때는 밤이 가득 들어 멋진 가방이 울퉁불퉁 불룩 튀어나왔었지요.
아버지!
다음 생에 다시 만날 때는 제가 아버지하고 아버지가 아들하세요. 이번 생에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그대로 돌려드릴테니까요. 사랑해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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