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한국 방문 길에 고교 동창생들의 기독교 신자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신교, 구교 구별하지 않고 기독교 신자들끼리 모여 시간을 함께 하는 모임이었다. 모임 장소는 성공회 동대문 성당이었다.
목사, 장로, 성공회 사제를 비롯해 기독교 신자인 친구들이 모였다. 졸업후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간단하게 종교의식을 행하고 각자의 근황을 돌아가며 얘기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신앙생활, 가족들 이야기 등을 비롯해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눴다. 모임 장소인 성공회 동대문 성당 본당 신부인 석광훈의 차례가 되었다.
“여러분은 내가 신부가 된 것이 신기할 거다. 어떻게 말더듬이가 신부가 되었을까? 나는 늘 열등감에 휩싸여 살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내게 질문을 할까봐 늘 두려웠다. 아무리 말을 더듬지 않으려 해도 입 밖으로 나오면 더듬었다. 아이들이 모두 웃었다. 나를 놀렸다. 말더듬이라고 바보 취급을 했다. 때문에 학교에 가기도 싫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우연히 그리스의 말더듬이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웅변학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웅변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 대학을 마치고 대기업에 취직을 해서 다녔다.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성공회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했고 성공회 신부로 평생 봉직했다. 은퇴를 몇 해 앞두고 있다.”
석신부의 말이 끝나자 친구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한 그의 용기에 대한 박수였고, 그와 함께 학창시절을 하면서 그가 힘들게 적응하던 모습이 기억나기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초등학교 때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 선생님이 국어, 산수, 사회, 자연에서 음악, 체육에 이르기까지 온 종일 가르치지 않고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이 들어와 가르쳤다. 게다가 교내에 매점이 있는 것도 초등학교와는 다른 점이었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 건물 밖으로 나와 매점까지 갔다가 빵이나 도넛츠를 하나 사먹고 오는 재미도 있었다. 삼립 버터빵도 맛이 있었지만 달콤한 설탕을 살짝 두른 도넛츠의 팥 또한 일품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추억이 어디 한두 가지로 그칠 수 있을까.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웅변대회가 열렸다. 반공을 주제로 한 것으로 보아 6월 25일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반에서 두 명이 나가게 되었다. 석광훈과 나, 석광훈은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여 쇳가루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친구다. 석광훈은 말을 더듬었다. 그런 친구가 웅변대회에 나간다고 하니까 모두들 비웃었다. 나 역시 석광훈이 웅변대회에 나간다고 하니 믿기 힘들었다.
난 열심히 원고를 외웠고, 나름대로 제스추어를 만들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쫙 뻗으며 손가락을 모두 펴서 청중의 박수를 유도하는 동작도 만들어 내고, 단상을 내리치며 북한 공산당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냈다.
드디어 웅변대회가 열렸다. 각 학급에서 뽑힌 연사들이 단상을 오르내리며 반공을 국시로 하는 조국의 정통성과 북한의 폭력성을 폭로했다. 평화통일을 위한 염원들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드디어 석광훈의 차례가 되었다. 평소에 말을 더듬던 친구가 전혀 말을 더듬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의 토씨하나 흘리지도 않고 분명하게 또박또박 발음했다. 자기 소리를 내었다. 떨지도 않았다. 제스추어도 청중들의 호응을 얻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아주 훌륭한 웅변이었다.
입상자들을 발표했다. 3등, 2등을 호명하고 이제 1등을 부를 차례였다. 당연히 내가 1등이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2등, 3등을 부르는데 나를 부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1등은 석광훈이었다. 나는 등수 안에 들지도 못했다.
석광훈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같은 반을 한 적도 없었고, 같이 어울리지도 않았다. 졸업후에도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들려오는 소문도 없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석광훈은 성공회 신부로 재직 중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석광훈은 자신의 단점을 이겨내고 멋지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학창시절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웅변대회에 입상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며 그 이후로 학교생활에 자신이 생겼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웅변대회에 나갔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고백했다. 그 웅변대회에 나갔다가 입상도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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