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자식들

Cmaker 2017. 8. 4. 22:55


   비행기에 탑승 직전이라며 딸이 전화했다. 아시아나 항공 직원들이 친절하게 도와줘서 규정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짐이 몇 개 있었지만 오버차지를 하지 않았으며, 손으로 들고 가는 짐도 지나치게 많다며 따로 돈을 받지 않고 몇 개를 부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전해주었다. 식구대로 2개씩 부칠 수 있다며 12개의 이민 가방을 싣고, 핸드케리를 한 사람이 하나씩 들고 떠났다. 짐이 너무 많아 셔틀 밴을 불렀지만 공간이 부족해 친구의 미니밴까지 동원해서 공항으로 출발했기에 걱정이 많던 차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사위가 탑승했다며 여섯 식구가 손흔드는 사진을 보낸 뒤로는 연락이 없다. 딸은 전화를 끊으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또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사돈이 사진을 보냈다. 도착해서부터 식사할 때까지 장면, 장면을찍어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도 사돈이 사진을 보냈다. 사돈 처녀가 휴가를 내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딸과 사위는 외부 일을 처리하러 다니고 있다고 했다.


   역시 사돈이 아이들이 한국 국적을 받았고, 주민등록 번호도 받았으며, 당신과의 관계가 적힌 호적에 등록이 되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손주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해주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연락한다던 딸은 단 한 줄도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뭐 꼭 소식을 들어야 맛이 아니다. 본인이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도착 즉시 연락하겠다고. 그래 놓고 며칠이 지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 모두 그 모양이다. 생전가야 전화 한 통화하지 않는다. 궁금하면 내가 전화나 카톡을 보내야 한다. 잘있냐? 예. 간단 명료하다. 무슨 군대도 아니고. 부모와 자식의 통화가 이렇게 간단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때 문득 드는 생각, 그렇다면 난 어떻게 했는가?


   아, 그렇다. 자식들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 미국으로 이주해와 부모님과 몇 번이나 전화통화를 했던가? 편지는? 서너 번의 전화 통화가 있었지만 모두 어머니가 전화를 건 것이다. 국제통화 요금이 비싸다며 나보고 걸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당신이 걸었다. 그때마다 짜증을 냈다. 잘 있으니까 전화하지 말라고 요금도 비싼데. 편지를 어머니가 자주 보냈다. 지금도 그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 아범 잘 있는가? 이곳의 우리도 잘 있다로 시작해서 자식 걱정을 써서 보냈다. 외국살이 힘든데 돈 아껴쓰고, 몸 무리하지 말고, 이거 조심하고 아이들 잘 챙겨라. 내 나이 마흔에 미국에 왔는데 어머니는 철부지 아들에게 온통 하지 말고 조심하라고 얘기하셨다. 그뿐이 아니다. 6개월에 한 번씩 오셔서 끊임없이 챙기셨다. 아내는 아침 잠이 많은 데다 아이들을 2년 상간으로 연달아 낳았기에 새벽에 나가는 남편 식사를 챙기지 못할 때도 많았다. 어머니는 꼭두 새벽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려 놓고 아들이 한 수저 뜨고 나가길 바랬다.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차려 놓은 상을 쳐다 보지도 않고 그냥 휙 지나서 나갔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매일 아침상을 차려 놓았다. 어쩌다 식탁에 앉아 몇 술 뜨는 걸 보면 어머니는 입을 다물지 않고 좋아 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암을 선고 받았으며 정상적으로 대소변을 볼 수가 없어 튜브를 차고 계실 때였다. 아, 죽일 놈이다. 내가. 매일 아침 어머니와 마주 앉아 어머니와 이야기 하며 아침을 먹고 나갔으면 어머니가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자식들이 하나 같이 그 모양이다. 큰아들, 연락한 적이 별로 없다. 미국에 살 때나 한국에 살 때나 마찬가지다. 어쩌다 연락하면 제가 아쉬울 때다. 사업상 필요한 일이나 미국에 몇일날 오니까 공항에 나오라는 그런 얘기. 녀석은 스무살이 되던해에 집을 나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을 하며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또 나갔다.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한국 군대에 갔다. 군에서는 논산훈련소 조교를 했다. 제대후에 영어학원에서 매니저를 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국 지사에 파견되어 나갔다가 그만 두고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 hook이라는 천연향수를 직접 제조하고 판매하는 공덕상회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혼인했으며 아들이 하나 있다. 


   둘째가 이번에 한국으로 이주한 딸인데 우리집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얼바인에 살았고 주일에 한 번은 만나며 지냈다. 가끔 전화나 카톡도 하고. 그런데 한국으로 가더니 며칠 째 소식이 없다. 


   셋째, 딸이다. 오는 11월에 22살이 된다. 샌프란시스코에 직장이 있다. 올해 5월에 졸업을 하고 아시아 여행하고 돌아와 7월부터 일하고 있다. 이 녀석은 어쩌다 전화를 하긴 하는데 다 자기가 아쉬운 일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언제 집으로 가니까 그리 알라. 언제 아프리카에 간다. 하이티에 간다. 가끔 소식을 전할 뿐, 문안 인사를 하는 법이 없다. 네 아이들 중에 가장 냉정한 편이다. 며칠 전에 엄마에게 전화해서 이번 토요일 집으로 간다며 남자 친구를 데려가도 좋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녀석에게 남자 친구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아내에 의하면 남자친구는 같은 학교(Hass School of Berkeley)에서 공부한 친구인데 부모가 대만에서 온 이민자이며 미국 출생이라고 했다. 이제 내일이면 녀석이 오니까 누군지는 밝혀질 것이다. 내 딸이 고른 녀석이면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넷째, 아들이다. 이놈은 막내라 그런지 다정다감하고 그래도 비교적 연락을 가끔한다. 주로 엄마에게 하는데 아빠가 옆에 있다고 하면 바꾸라고도 한다. 녀석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농구를 했다. 대학 2학년까지 한 후에 그만 두었다. 농구로 앞길이 보이지 않는데다 학업에 열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무엇이든지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내 인생이 아닌데 자식이라고 이래라 저래라. 해라 하지말라 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고 저렇고 선택한 뒤에 나타나는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는 한다. 의논할 경우에 한해.


   농구를 그만 두기 전에도 아들은 내게 의논했다. 농구로 졸업후에 진로가 밝지 않다는 내 생각을 밝히면서도 속으로는 아들이 농구를 계속하기 바랬다. 지금까지 학업과 농구를 병행해 오지 않았는가? 고교시절 농구팀 주장을 하면서도 GPA를 4.5 유지 하지 않았는가? 우선 일년 학비와 기숙사비 등 약 6만 달러를 세이브할 수 있다는 경제적 의식도 작용했다. 그런 내 속셈을 간파했는지 아들은 농구를 그만 두더라도 학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미 다 알아보고 내게 의논을 했던 것이다. 하긴 농구를 그만 두겠다고 하기 전에 USC나 UCLA로 학교를 옮기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옮기는 것도 좋지만 이곳에 와서 다시 적을 기간을 거치고 하다 보면 농구를 그만 두더라도 그곳에서 마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을 제시하기는 했었다. 그런데도 녀석을 두 학교 뿐만 아니라 몇군데에 전학신청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본인 뜻하는 학교에서 허가를 하지 않자 차선책으로 택한 결정이라고 여겨진다. 아들과 나는 전학에 관해서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에 학교측으로부터 어떤 답변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농구를 그만 두었으며 여름방학을 마치자마자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가서 한 학기 공부를 하고 돌아오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차를 친구 집에 맡기고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차를 6개월씩 친구집에 두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니까 아빠가 가서 우리 함께 대륙횡단을 하자고 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7박 8일간 함께 먹고 자고 구경하며 대륙을 횡단했다. 오는 찻속에서 아들의 걱정은 여름방학 동안 인턴십을 하기 위해 50여군데 어플리케이션을 보냈는데 단 한 곳도 연락이 없다며 속상해 했다. 그러면서 아빠가 혹시 아는 분들께 얘기해서 자리를 마련해주면 안 되겠냐고 도움을 요청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반드시 연락이 올테니 좀 더 기다리라고 했다. 집에 도착하고 사나흘 지나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업체였다. 아들은 인터뷰를 하러 올라갔고 지금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오는 12일 집으로 와서 며칠 지내고 17일 코펜하겐으로 떠난다. 녀석은 자기가 있는 동안 엄마 아빠가 꼭 와야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받은 바 있어 이번 가을에 코펜하겐으로 떠날 계획이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양노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간단한 수술(엉덩이에 종기 제거)을 한다고 닥터가 직접 전화했다. 수술이라고 해서 짜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ㅎㅎㅎㅎ. 수술은 수술이다. 보호자의 동의를 받기 위해 전화했다며 간호사를 바꿔줄테니 간호사가 묻는 말에 답하고 동의한다고 말하라고 했다. 간호사두 사람이 담당이 다르다며 번갈아 가면서 신원을 확인하고 동의 여부를 물었다. 

   

   1969년 여름 방학 직전에 41세의 아버지는 동대문 소재 모 병원 앞으로 오라고 했다. 달려갔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수술대에 눕히고 혁대를 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포경수술을 했다. 그런데 2017년 89세인 아버지가 엉덩이의 뽀루지를 제거 한다고 양로병원측에서 연락이왔다. 89세가 되는 2052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을까? 양로병원, 병원 수술대, 아니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 네 자식 중에 누가 나를 찾아올까? 


   수술한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면 내게 연락을 하는데 사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아버지가 입원하고 계신 병원으로 갔다. 마침 간호사가 아버지가 식사하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수술후 지금까지 음식을 드시지 않았는데 오늘부터 잡수신다며 간호사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이다. 아버지도 아들을 보더니 기운이 나시는 모양이다. 입에 넣어 드리는대로 맛있게 잡수셨다. 아이스크림까지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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