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병술(丙戌)년이더군요.
개띠
해입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개는 사람에게 가장 충직하고 친근한 동물입니다.
메국에서도
그렇습니다.
메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완동물이 바로 개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노만 록웰도 개를 자주 그렸습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표지로 그린 322개의 그림 중에서 약 50개 이상에 개가 등장합니다. 또 록웰의 그림에서 개는 주로 어린이들과 같이 등장합니다. 아이들이 친구나 형제처럼 대하면서 함께 자라는 게 현실이다 보니,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창문 밖을 보는 소년, (Boy Gazing Out A Window)>
노만 록웰 (Norman Rockwell, 1894-1978)
1922년 6월10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때는
바야흐로 싱그러운 초여름.
이런
계절에 교실에 앉아 수업을 받는다는 건 좋은 날씨에 대한 모독입니다.
적어도
소년의 사고방식에선 그렇지요.
그러니
소년의 표정이 불만과 낙심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소년의
'슬픔'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바로 '쫑(가명-특정
견(犬)과
관련 없음)'입니다.
쫑은
소년이 낚시를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애용하던 나뭇가지로 만든 낚싯대와 미끼 통을 물고 소년을 찾아갔습니다.
쫑은
학교 건물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창문너머
자기 소년을 찾아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창문을 두드리면서 소년을 부릅니다.
"멍멍
(뭐해?
날씨
좋은데...
빨랑
나와.)"
소년의 마음이야 당장이라도 책을 팽개치고 교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겠지요.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습니까? 그저 슬픈 표정으로 물끄러미 쫑을 바라볼 뿐입니다.
<불, (Fire)> 노만 록웰
1931년 3월28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놀
쾌가 생기면 소년과 쫑은 당연히 한통속입니다.
세상에
불 구경 만큼 좋은 구경이 없다지요?
옆
동네 슈퍼에서 불이 난 모양입니다.
자원
소방대원인 아버지는 출동 연락을 받자마자 복장과 도구를 갖추고 신속하게 달려갑니다.
아버지의
출동 연락을 엿들은 소년도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소년이
뛰니까 쫑도 덩달아 뜁니다.
빨리
가서 불을 꺼야 하는 아버지의 표정은 심각하고 다급합니다.
그러나
불이 화마로 보이기는커녕 신나는 구경거리로만 보이는 소년의 표정은 짜릿한 흥분 그 자체입니다.
쫑은
물론 소년 편입니다.
가재는
게편이니까요.^^
"멍멍 (빨랑 가자. 꺼지기 전에...)"
<대말, (Stilt Walker)> 노만 록웰
1919년 10월4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하지만
소년과 쫑이 항상 호흡이 잘 맞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쫑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엊그제
마을에 들어온 유랑 서커스단 공연에서 소년은 광대가 기다란 대말을 타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걸 보았더랬습니다.
얼마나
멋있던지요.
소년도
헛간에서 찾은 작대기 두 개와 가죽끈을 얽어서 대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승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대말을 탄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초보 운전자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엎어져서 코를 깨뜨릴 수가 있습니다.
연습
끝에 소년은 균형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쫑도
소년이 대견했나 봅니다.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좋아라 하며 소년 주위를 껑충껑충 뜁니다.
그러다가
쫑의 목걸이에 달린 긴 끈이 소년의 발을 걸어 버렸습니다.
딱
3초만
지나면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은 넘어지겠지요.
쫑은
소년이 왜 골이 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멍멍 (얼씨구? 남 탓하지 말고 너나 잘해.)"
<개를 돌려보내는 소년, (Boy Sending Dog Home)>, 노만 록웰
1920년 6월19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지난달부터
소년은 옆동네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마침
학교에서 파티가 있나 봅니다.
소년은
소녀에게 파트너가 돼 달라고 청할 요량입니다.
꽃을
꺾어 들고 소녀의 집으로 가려는데 쫑이 마음에 걸립니다.
지난
번 대말 탈 때처럼 말썽이라도 부리면 낭패입니다.
좋아하는
소녀 앞에서 무슨 꼴이겠습니까?
그래서
소년은 쫑을 말뚝에 묶어 버렸습니다.
그
동안 집이나 지키고 있으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정도로 물러설 쫑이 아닙니다.
몇
번 힘을 쓰니까 말뚝 채 빠져 버렸습니다.
쫑은
소년 뒤를 쫓아서 소녀의 집 앞까지 한달음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웬걸,
반길
줄 알았던 소년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집으로 가라고 난리입니다.
데이트를
앞두고 방해꾼이 반가울 리가 있겠습니까?
현관문
유리 너머로 소년과 쫑을 바라보는 소녀는 벌써부터 재미있기 시작합니다.
파티보다
더 재미있는 장면이겠지요.
뜻하지
않은 박대에 쫑의 배신감은 커져만 갑니다.
"멍멍 (강호의 의리가 겨우 이거야? 자, 선택하라구. 여자야, 아니면 나야?)"
<풋사랑, (Puppy Love)>, 노만 록웰
1926년 4월24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소년에게는
당연히 여자가 중요하지요.
강아지보다
소녀가 좋아질 때가 됐으니까요.
소녀의
오른 손에는 소년이 꺾어 준 데이지 꽃 두 송이가 들려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학교 끝나고 내내 데이트를 했지만,
아직도
뭔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귀가를
조금 미루고는 동네 뒤쪽 야트막한 언덕에 올랐습니다.
마련된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함께 달을 바라봅니다.
소년은
슬그머니 소녀의 허리를 껴안았고,
화답이라도
하듯 소녀는 머리를 지긋이 소년의 어깨에 기댑니다.
쫑은
왕따지요.
소년과
소녀 사이에 쫑이 낄 틈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던 방과후 낚시도 뒷전이었으니까요.
쫑은
점점 소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멍멍 (얘가 약 먹었나? 낚시보다 빨강머리가 좋단 말야?)"
<내리막의 레이스카, (Downhill Racing Cart)>, 노만 록웰
1926년 1월9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쫑이
자꾸 불만을 늘어놓으니까 소년도 조금 미안했나 봅니다.
이번에는
소녀와 함께 쫑도 초대했습니다.
문제는
이게 진진한 낚시나 신나는 파티가 아니라 신형차 시승식이라는 점입니다.
소년은
헛간을 뒤져 그러모은 잡동사니로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바퀴는
어린 동생의 유모차 바퀴인가 봅니다.
차체는
오래된 판자조각들을 자르고 못질해서 만들었습니다.
헤드라이트
대용으로는 석유 램프를 달았군요.
그리고
파티에서 썼던 종이 나발을 가지고 경적 대용의 확성기로 쓰기로 했습니다.
초대
손님이라도 격이 좀 다릅니다.
소녀는
뒷좌석에 앉혔지만 쫑은 울타리도 없는 화물칸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내리막길을
달리는 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운전기사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소녀는
비명을 질러댑니다.
운명을
하늘에 맞긴 쫑은 겁에 질려 있습니다.
사실
쫑에게는 언제 박살날 지 모르는 신형차의 공포보다는,
1인자
자리를 소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상실감이 더 클 지도 모를 일입니다.
"멍멍 (그래... 차라리 이대로 다같이 죽어 버리자.)"
<아픈 강아지, (Sick Puppy)>, 노만 록웰
1923년 3월10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그러나
쫑에 대한 소년의 사랑이 식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쫑이 감기 몸살에 걸렸습니다. 오뉴월
감기도 넘기고, 일교차가 엄청난 뉴잉글랜드의 가을 감기도 피하고, 기나긴 엄동설한 속에서도 어디 한번 아픈 데 없이
지냈는데,
봄바람 솔솔
불면서 그만 쫑이 감기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의 정성어린 간호가 보통이 아닙니다.
사과
궤짝에 짚을 깔아서 푹신하게 만들어 주고 자기가 덮던 모포를 가져다가 쫑을 덮어 줬습니다.
쫑이
몸을 뒤챌 때마다 모포가 흘러내리니까 소년은 옷핀으로 모포를 고정시켜 줬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먹던 감기약을 가져다가 쫑에게 먹입니다.
용량을
정확하게 재려고 숟가락에 떨어지는 물약에 온 정신을 집중시킨 소년의 표정은 쫑에 대한 애정과 진심어린 걱정 그 자체입니다.
쫑은
신열로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소년을 바라봅니다.
"멍멍 (짜식... 이럴 때 보면 의리는 있단 말야.)"
<바다를 바라보며, (Looking Out To Sea)>, 노만 록웰
1927년 10월호 <레이디스 홈 저널> 삽화
소년이
어렸을 때는 원래 삼인조로 몰려 다녔습니다.
쫑과
소년과 할아버지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먼저 조직을 이탈(?)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할아버지는 소년과 쫑을 데리고 선창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곤 하셨습니다.
선창을
막 출발한 배가 한 척 왼쪽에 보입니다.
그리고
멀리에는 항해를 마치고 들어오는 배도 보입니다.
할아버지는
소년의 어깨를 두들기시면서 말씀하시곤 하셨지요.
"내
항해는 끝나간다.
이젠
네 항해를 시작하거라.
저
넓은 바다를 향해..."
그게
무슨 말씀인 지 소년이 알아먹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걸
이해하려면 소년이 다시 할아버지 나이가 돼야 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년의 옆에서 나란히 바다를 보던 쫑은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을 겁니다.
"멍멍
(오,
캡틴...
마이
캡틴...)"
<집 떠나기, (Breaking Home Tie)>, 노만 록웰
1954년 9월25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소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렇게
놀면서도 공부는 웬만큼 했는지 주립대학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부활절
때나 한번씩 입던 하얀 양복을 입었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하얀 바탕에 붉은 무늬 넥타이를 맸습니다.
넥타이와
맞추느라고 그랬는지 양말도 빨강과 하양으로 얼룩진 걸 골랐군요.
아버지의
표정은 착잡합니다.
처음으로
집 떠나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 무슨 이야길 해도 소용없다는 걸 다 아십니다.
그저
'나는
언제나 여기서 너를 기다리겠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할뿐이지요. 물끄럼한
표정을 지으실 뿐 손에 든 딱성냥으로 입에 무신 담배에 불붙이시는 걸 잊어버리셨습니다.
아버지의
착잡함에는 아랑곳이 없는 소년은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연신 간이역의 플랫포옴을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언덕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떠올랐던 바로 그 표정입니다.
"네
항해를 시작하거라.
저
너른 바다를 향해"
하셨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소년이
그걸 잊어버릴 때마다 쫑이 상기시켜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이별을 준비하는 쫑의 표정은 섭섭하고 슬프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멍멍
(쿼바디스...)"
평미레
드림/

'스크랩해온 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고갱 작품 이야기 (0) | 2006.01.13 |
---|---|
[스크랩] 후기인상주의 /고갱 (0) | 2006.01.13 |
[스크랩] 병술년 개팔자 (0) | 2006.01.10 |
[스크랩] 눈에 좋은 풍경 (0) | 2006.01.07 |
[스크랩] 선암사의 겨울 (0) | 2006.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