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다
(2012년 11월 어느날 일기)
어릴 때 목욕하는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솥에다 물을 펄펄 끓여놓고 사 남매를 차례대로 불러 때를 벗겼다. 여동생을 먼저 씻길 만도 하건만 어머니는 언제나 장남부터 씻겼다. 굵은 때가 어머니 손에 밀려 국수발처럼 쑤욱 쑤욱 나왔다. 물이 식거나 때가 많이 떠다니면 물을 삼분의 일쯤 퍼버리고 다시 더운 물을 섞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어머니는 집에서 씻기지 않고 목욕탕으로 보냈다. 주로 추석이나 구정 전 날이었다. 이때는 동생들을 인솔해서 간다. 샤워를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 속에 들어가 때를 불린 다음 동생들의 등을 밀어주고 비누칠을 해준다. 동생들은 주로 노는 일에 열중하느라 씻는 일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 가는 날은 엄숙한 가운데 진행된다. 옷장에 옷을 벗어 놓고 순서대로 입장한 후에 샤워를 하거나 탕 속에 받아 놓은 물을 끼얹은 다음 비누칠을 하고 탕 속에 몸을 담근다. 적당히 때를 불리고 막내부터 차례대로 아버지에게 등을 대고 앉는다. 어머니가 때를 밀 때와는 순서가 바뀐다.
지난 일요일 아버지와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는 팽팽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살갗이 아래로 다소 쳐졌을 뿐 아직도 강건했다. 단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텔레비전 화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작동하듯 느린 동작을 하는 것이 노인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옛날에 아버지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우리를 억지로 집어넣으려 애썼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득하다가 안 되면 소리를 질러가며 강제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지금은 열탕에 들어가지 못한다. 온탕에서도 삼 분을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 하면서 나왔다.
찜질방으로 갔다. 커다란 홀을 중앙에 두고 여러 기능을 하는 방들이 좌우로 펼쳐져 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누웠다. 등이 따뜻하고 잠이 살살 온다. 한잠 자려는데 아버지는 시원한 곳이 없는가 묻는다. 온돌을 그리워 할 만도 한데 아버지는 더운 것을 싫어한다. 답답하다는 것이다.
시원한 방도 있었다. 어두운 방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고 담요도 있다. 아버지와 누웠다. 아버지는 곧 잠이 드신 듯하다. 여러 사람이 사용했던 담요를 덮고 있자니 찝찝하다. 다시 따뜻한 온돌방으로 돌아온다. 한참 지나서 가보니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시고 있다. 추운 방에 너무 오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버지를 깨워 목욕탕에 들어가자고 하니까 싫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었다. 미역국에 불고기를 시킨다. 아버지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다 드셨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약을 한 움큼 챙겨 드신다. 아버지는 목욕탕 안에서도 방향 감각이 없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모셔다 드렸다.
아버지는 아기가 되어 있었다. 노인이 되면 아이가 된다는 말을 그냥 우스갯소리로 들었는데 참말이었다. 목욕탕에서 몇 시간 정도 지나자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들이 혼자 가버릴까 불안한 눈치였다. 일부러 아버지 옆에 같이 눕는다. 아버지는 금방 잠이 드셨다.
저녁때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또 약을 챙겨 드시고 잠자리에 드신다. 하루 종일 주무시고 또 주무신다. 커다란 목소리로 야단을 치던 아버지, 아름드리 밤나무를 발로 차서 알밤을 우수수 떨어트리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아버지, 한 번 빼먹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약 챙겨 먹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아버지를 보면서 내 나이 때의 아버지를 기억해본다. 그때는 젊고 멋있었다. 아니 불과 이삼 년 전만 해도 젊은이 못지않은 근력을 자랑했는데 오늘의 아버지는 완전히 어린아이가 되어 있다.
목욕탕에 다녀오고 여러 날이 지나도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 그럴까 한 동안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인생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다. 언젠가 닥쳐올 날들이다. 거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다짐하니 편한 마음이 되었다. 이십여 년 전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날 아버지와 목욕탕에 갔었다. 서로 등을 밀어 주면서 다시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올 날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아버지의 등을 내가 밀어 준다. 우리의 모습을 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나에게로 그리고 내게서 아들에게로 표표히 흘러가는 생명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