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환갑 줄에 접어드는 제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친구같이 느껴졌다. 무슨 애기를 해도 불편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신설학교 1기 졸업생들이다 보니까 개교와 동시에 입학해 1학년부터 3학년 졸업까지 함께 했기에 끈끈한 정이 생겨 더 그런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소주 반병이면 딸딸딸해졌는데 한 병 이상을 마셨으나 의식이 명료하다. 아니 더 뚜렷해지고 전혀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네 명의 제자들 중 두 명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고 두 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부어 넣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두 명은 이미 은퇴해서 연금을 받으며 주식으로 소득을 올리면서 이렇다 하게 하는 일 없이 지내는 듯 보였고, 술 잘 마시는 두 친구는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다. 한 명은 부동산, 한 명은 건축업. 술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니 한 제자가 이미 계산을 했다면서 화장실만 다녀오라고 했다. 화장실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닌지라 그대로 앉아 술을 계속 마셨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다음에는 내가 사겠다고 날을 잡아서 연락하라고 했다. 오늘은 고기를 먹었으니까 다음에는 회를 먹자고 하면서 음식점 이름까지 알려주면서 날만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의논해서 날을 잡았노라고 했다. 일주일 후 금요일 오후 6시. 장소는 내가 말한 그곳으로. 퇴근시간이 6시인지라 조금 일찍 나섰다. 혼자 나가기 뭐해, 또 업무도 다 마친지라 모두 퇴근하자고 했다. 부지런히 약속 장소로 달려가니 정각 6시, 한 사람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계산을 치렀던 친구다. 둘이 앉아 얘기하고 있는데 다른 세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들어섰다. LA에 사는 한 사람이 합세했다.
또 똑 같은 얘기들이 시작된다. 언제나 학창시절에 선생님께 맞았던 이야기는 빠질 수 없다. 내가 몹시 악명을 떨쳤었나 보다. 모두 내게 맞았다는데 오늘 처음 온 친구는 무지무지하게 심하게 맞았다고 했다. 창밖에서 이 친구가 맞는 것을 모두 다 봤다고 했다. 오마이갓 증인들까지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나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왜 맞았냐고. 내가 왜 때렸냐고? 매 맞았다는 당사자가 말했다.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가서 타학교 불량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다 걸렸으며 그 일로 뒈지게 맞았다는 것이다. 나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다른 학교 불량 학생들하고 어울렸다는 그 이유만으로 내가 왜 때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맞지 않았는데 맞았다고 할 리도 없지 않은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했다. 내 친한 친구 중에도 선생님과 만나서 술만 취하면 왜 때렸냐고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등록금 못 냈다고 왜 때렸냐고 명확한 이유가 있다. 술 마시고 취하기만 하면 선생님께 왜 때렸냐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ㅎㅎㅎㅎ.
한 친구가 혹시 다른 1회 졸업생들하고도 만나는가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명이 있다.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고 일식당을 운영하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하려고 했으나 전화번호가 뜨지 않았다. 카톡을 보니 이름이 떴다. 정용수,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문자를 남겼다. 용수야, 문자를 보면 편할 때 전화해라. 하루 이틀 지나서 문자를 보니 친구가 확인했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이리 저리 전화번호부를 뒤져 보니 정용수는 내 -지금은 소식이 없는-대학 동창생이고, 제자의 이름은 전용수였다. 그리고 그는 대원고 1회 졸업생이 아니고 대원외고 1회 졸업생이었다.
늙어서 그런 걸까? 아니다. 나는 젊어서도 그랬다. 네 명의 아들 딸 들 중에 한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늘, 네 명을 다 부르곤 하지 않았는가. 깜빡깜빡하며 한 세상 살았고, 여전히 이러고 산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 친구가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2학년 때 담임을 했던 친구다. 지난 번에는 지팡이를 짚고 나와 걱정을 했었는데 오늘은 지팡이를 짚지 않고 나왔다. 뭐냐? 이게? 선생님, 산삼입니다. 두고두고 잡수세요. 오마이갓, 왠 산삼을? 집에 와서 보니 말린 산삼이 잔뜩 들어 있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내가 돈을 내지 못하게 했다. 회를 대짜로 두 접시나 먹고, 산낙지 세 마리, 전복 세 마리, 소주를 8병이나(소주는 네 사람이) 마시고 사이다를 3병(두 사람이)이나 마셨는데...... 선생님께서는 다음에 사라고 했다. 그래, 다음에 더 맛있는 거 먹자. 내가 꼭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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