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머리가 어딘가에 닿기만 하면 잠 들어버리는 Automatic Sleeping Machine으로 자부하는 내가 쉽게 자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하루 이틀 지나면 도로 원래의 기능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기다렸으나 사흘 나흘 닷새가 지나도 여전하다.
지난 9일 LA 할리우드 돌비 극장(Dolby Theater)에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영화가 오스카상 후보로 올랐다는데 수상식에 참석은 못할망정 어찌 TV시청을 마다한단 말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국제 장편 영화상이나 각본상 정도를 수상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한국영화 최초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장편 영화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올해 아카데미 최다 수상을 기록했다.
첫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은 감격과 감동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한국인 감독이 한국에 사는 요즈음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아 만든 영화가 세계인의 영화제에서 난다 긴다 하는 국제적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세계적인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들과 경쟁해서 당당하게 4개 부분을 석권했다는 그 기쁨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TV화면에서 캡처한 사진들을 여기 저기 옮겼다. 친구들에게도 보내고 SNS에도 올리며 대한민국의 쾌거라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뻐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한국에서 한 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오클라호마에 사는 미국인 Jennifer Mulvaney 선생으로부터 텍스트를 받았다.
Congratulations to the filmmakers of Parasite. They won many Oscars and best picture. Hope all is going well and everyone is staying away from the flu.
대단한 일이기는 한가보다. 일 년에 한두 번 안부 인사를 보내주는 친구가 한국 영화가 오스카 상 수상했다고 문자를 보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감동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해 11월, 선배로부터 서부영화 100편 이상이 담긴 USB메모리를 선물 받았는데 그 중에 '기생충'이 담겨 있었다. 선배의 실수로 서부영화들 속에 들어 온 것인가 생각하고 선배에게 물었더니 그 영화가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고 했다. 기생충하면 어릴 때 기생충검사를 위한 채변 봉투가 연상되고 어디선가 본 회충 덩어리가 떠올라 별로 보고 싶지 않았으나 칸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은 작품이라고 하니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궁금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매우 찝찝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괴기영화를 본 느낌이랄까?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한국영화가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고 세계가 떠들썩하니까 덩달아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시상식을 보게 되었고, 4개 부문에서 수상을 하고나니 기분까지 좋아졌으나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오스카상을 받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끔찍한 영화가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상을 네 개씩이나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다시 보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커다란 TV화면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그영화를 다시 보았다.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나서도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영화, 봉준호의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네 개 부문에서 받아야 했는지. 나의 이런 생각과 달리 세계의 모든 언론은 찬사를 쏟아 붓고 있다. 언론뿐이 아니다. 영화 관계자들, 관계기관 전 세계의 모든 영화 관련사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다음은 한 언론의 기사를 옮긴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1994년 단편 영화 <백색인>으로 데뷔 후 특정 장르의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허를 찌르는 상상력에서 나온 새로운 이야기들로 영화팬들을 매료시켜왔다. 인간애와 유머, 서스펜스를 넘나드는 재미를 선사하면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질문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작품 세계는 이번 <기생충>에서도 면면이 이어졌고, 이는 평단과 관객을 가리지 않는 작품에 대한 높은 만족도로 이어졌다. 특히 해외의 경우 작년 10월 11일 북미 개봉과 함께 <기생충>은 연출, 각본, 연기, 미장센 등 영화 속 모든 요소들이 주목받으며 '봉하이브'라는 신조어로 대변되는 팬덤을 양산했다. 또한 다수의 외신과 평론가들은 <기생충>에 대해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통 과제인 빈부격차 문제를 영화적 문법으로 탁월하게 풀어냈다는 호평을 쏟아냈다. <기생충>은 이른바 북미 4대 비평가협회상이라 불리는 전미 비평가협회(작품상, 각본상), 뉴욕 비평가협회(외국어영화상), LA 비평가협회(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시카고 비평가협회(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에서의 주요 부문 수상은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의 바로미터라 불리는 미국 배우조합(SAG), 미국 작가조합(WGA), 미국 미술감독조합(ADG), 미국 영화편집자협회에서 주는 최고상들을 잇달아 수상하며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미국 언론과 평론가들도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유력하게 내다봤다. LA 타임스의 영화 평론가 저스틴 창은 "다크호스 중의 다크호스이자 역대 최강의 와일드카드인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할 것"이라 강조했으며, 미국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 역시 "<기생충>은 외국어 영화로서 최초의 작품상 수상작이 될 것"으로 점치기도 했다. 또한 국제 장편 영화상에 대해서는 두 매체 모두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매체 버라이어티는 "봉준호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할 것"이라고,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기생충>이야말로 올해 최고의 영화이자 가장 신랄하고 통렬한 작품"이라고 평가를 내놨다.
한편 이번 아카데미상 수상의 성과 뒤에는 한국영화계 최초로 진행됐던 '아카데미 캠페인' 과정에서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연례 행사처럼 벌이는 캠페인이지만 한국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기생충>은 하나하나 부딪혀가며 긴긴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완주했다. CJ ENM은 <기생충>의 북미 개봉(10월 11일) 이전부터 일찌감치 캠페인 예산을 수립하고 북미 배급사 네온(NEON)과 함께 투표권을 가진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들을 공략하기 위한 프로모션 활동을 벌였다. 봉준호 감독은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년 9월 이후로 살인적은 스케줄을 소화하며 수 백 차례에 걸친 외신 인터뷰와 행사 참석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BTS가 누리는 파워는 저의 3000배, (한국은) 그런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나라" 등과 같은 봉준호 감독의 매력적인 어록들도 현지의 큰 관심을 끌었다. 송강호를 비롯한 출연 배우들과 스태프들, 제작사인 바른손E&A 관계자도 바쁜 시간을 쪼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힘을 보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아카데미 캠페인 노하우'가 한국영화산업에 경험치로 쌓인 것도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스포츠 조선'
단순히 각본이 우수하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고 감독이 편집및 제작을 잘해서 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각본도 좋아야 하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고 감독이 훌륭해야겠지만 이를 위한 캠페인이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기생충'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 시각이 오전 4시 11분, 아직도 잠 못이루고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요일의 유혹 (0) | 2020.02.19 |
---|---|
잠 못 이루는 밤 2 (0) | 2020.02.15 |
봄날은 온다 (0) | 2020.02.06 |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 (0) | 2020.01.18 |
Farewell Graciela Lum (0) | 2020.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