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모세(광훈) 신부
이시노마키 오아시스교회 탐방기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시인의 ‘들꽃’의 시구대로 약 20일정도 머무니, 이곳 이시노마키(石卷)가 아름다운 어촌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일본에서의 기독교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가도 실감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면 아들이 ‘창피하다’며 어머니를 때린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한다.
이처럼 기독교의 박해지이자, 불모지인 이곳에 조영상선교사는 오아시스교회를 설립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지방에 닥친 동일본대지진으로 전기가 끊긴 오지의 노인요양시설에 머물고 있는 노인들과 의료진을 돕기 위해 조영상 선교사는 동경으로부터 수십 차례 구호물품 등을 전달하였다. 이런 조영상 선교사의 노고를 알게 된 일본경찰은 그에게 특별통행증과 유류 특별 배급권을 발급해주었다(주: 당시는 차량 1대에 하루 5리터만을 배급하고 있었다).
이시노마키는 어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4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지진으로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되고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긴급 피난 시설이나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일부 고향을 그리는 주민들이 옛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위해 조영상 선교사는 쉼터를 마련하여 차와 음료를 대접하고 식량, 이불, 의복 등을 비롯해 생필품을 지원하였다. 또한, 계속 거주하려는 주민들을 위해 동경 등 일본 대도시에 현지의 실정을 알려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여 집수리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시노마키 주민들의 신뢰를 밑바탕으로 조영상 선교사는 현재의 부지와 건물을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해서, 현재의 오아시스교회를 2016년 11월에 세웠다. 쓰나미로 반파된 편의점 건물이었기에 리모델링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고 한다. 약 3억 원의 비용이 소요되었고, 국내외의 모금으로 이루어졌다. 조영상 선교사는 교회와 자신의 거주공간을 일본교회에 헌납하였다. 교회는 교회라기보다는 지역사회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민들이 음악회나 공연을 하고, 재활용품 판매, 먹거리 나눔, 자원봉사 지원 창구 등의 역할을 교회가 하고 있다. 조영상 선교사는 재해를 입은 현지인들에게 작은 평화를 전하며, 섬김과 나눔의 사역을 하고 있다.
조영상 선교사는 27년 전, 일본으로 출국할 때에 자녀들의 세례를 나에게 부탁했고, 유언의 편지를 내게 보냈다. “아시아의 로마가 일본입니다. 일본의 평화와 복음화가 이뤄질 때 아시아의 평화가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을 새기고, 나는 이제 66세가 되어 일본어 히라가나를 배우며, 조영상 선교사를 도와 오아시스교회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성서공부와 설교 이외에 서투른 운전과 교회 정원 돌보기, 텃밭 가꾸기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오아시스교회에 등록된 신자는 현재 19명이다. 매주일 오전10시30분 주일예배를 드리고 매주 수요일은 10시 성서공부, 매주 토요일 8시에 산상기도회가 열린다. 산상기도회를 위해 교회에서 30분전에 떠나며, 비가 올 경우는 교회에서 기도회를 개최한다. 교인들의 헌금이 월 2~3만 엔 미만에 불과해, 조영상 선교사 지인들의 후원으로 교회 운영과 선교사의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교회운영을 위해서는 매달 12만 엔 정도가 필요하다.
이곳은 몇몇 가문들이 수대를 걸쳐 살아온 고장이므로 현지인들은 서로를 잘 안다. 현지인들은 한국여행은 물론 외국여행을 거의 해 본적이 없다. 이들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고정되어 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에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가사도우미 이야기, 어촌에 취업한 조선인 노동자 이야기, 최근 온 결혼이주한국인여성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믿기 어려운 것은 일본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시노마키는 이시노모리만화관(石ノ森の漫画館)이 유명하다.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만화 펜들이 방문한다. 일본의 유명 만화인 ‘사이보그 009’ ‘가면 라이더’ 등의 작가의 캐릭터와 일본 유명 만화 작가의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차로 30분 이동하면 일본의 3대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 미야기현 마츠시마(松島)의 우마노새(馬の背)가 있고, 전통적인 온천이 있다.
2019년 5월 15일
동일본대지진
동일본대지진(東日本大地震)은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14시 46분에 일본 산리쿠 연안 태평양 앞바다에서 일어난 해저 거대지진이다. 진앙은 도호쿠 오시카 반도 동쪽 70km 지점이며, 진원지는 수심 29km 아래 지점이다. 지진의 규모는 Mw 9.0-9.1로 일본 근대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자 1900년 근대적 지진관측이 시작된 이후로 4번째로 가장 강한 지진이다.
지진 발생 후 강력한 쓰나미가 발생하여 도호쿠 지방의 이와테현 미야코시에 40.5m의 해일이 덮쳤고,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는 내륙으로 10km까지 해일이 밀려들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혼슈가 동쪽으로 2.4m 이동하였고, 지구 자전축이 10cm-25cm가량 움직였으며 저궤도 지구중력장 탐사위성(GOCE)에서는 지진으로 발생한 음파 섭동의 초저주파를 인식하기도 하였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따로 동일본대진재(일본어: 東日本大震災,ひがしにほんだいしんさい 히가시니혼다이신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진 및 그 이후 닥친 쓰나미, 여진 등으로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 사이 동일본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2018년 12월 10일 기준 일본 경찰청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일본의 12개 도도부현에서 15,897명이 사망, 2,534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했으며, 228,863명이 원래 살던 집을 떠나 난민이 되어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2014년 2월 10일의 보고서에서는 건물 127,290채가 붕괴, 272,788채가 반파되었으며 747,989채가 부분 손상을 입었다고 집계하였다. 지진과 쓰나미로 일본 동북부 지역의 도로 및 철도가 끊기는 등 많은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화재 및 댐 붕괴 등으로 심각한 대규모의 구조적 피해를 입었다. 간 나오토 내각총리대신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65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 가장 어려운 시기이자 힘든 위기가 닥쳤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일본 동북부 지방 440만 가구가 정전되었고, 150만 가구가 단수되는 피해를 보았다.
지진으로 일어난 쓰나미는 여러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일으켰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7단계 노심 용해가 발생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사고 인근 구역은 대피구역으로 지정되어 수십만 명이 이주하였다.[38][39] 많은 전기 발전기가 꺼지면서 전력 손실로 인한 냉각기 고장 후 최소 3개의 후쿠시마 원전 노심이 수소 가스로 가득 차 폭발하였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주변 20km, 후쿠시마 제2 원자력 발전소 주변 10km 사람들은 긴급 대피하였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일어난 보험금 손실액은 대략 미화 1,450만 달러에서 3,460만 달러로 추정된다.[40] 일본은행은 지진 3일 후인 3월 14일 시장 상황을 정상화하기 위해 긴급하게 15조 엔(미화 1,830억 달러)을 방출하였다.[41] 세계은행은 이 자연재해로 발생한 피해액이 대략 미화 2,350억 달러로, 역사상 최악의 재산 피해를 입힌 자연재해라고 추측하였다.
지진이 일어난 3월 11일, 일본 기상청은 이번 지진을 공식적으로 "헤이세이 23년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일본어: 平成23年(2011年)東北地方太平洋沖地震)으로 명명했다.
지진 발생 직후 며칠 동안은 여러 대중매체와 조직, 단체 등에선 동일본대진재(일본어: 東日本大震災), '도호쿠 관동대진재'(일본어: 東北関東大震災) 등 통일되지 않은 명칭을 사용했으나 2011년 4월 11일 일본 국무회의에서 3월 11일의 지진에 의한 재해와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묶어서 '동일본대진재'라고 묶어 부르기로 결정하면서, 각 언론매체에서도 동일본대진재라고 통일하여 지칭하기 시작했다.
이후 약칭으로 지진이 발생한 날짜를 따서 단순히 3.11(일본어: さんてんいちいち / さんいちいち) 또는 3.11 대지진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