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난 우산을 싫어 한다.
어려서 하도 우산을 잘 잃어버려 어머니께 혼난 기억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비가 자주 오는 한국에서 국민학교 시절 얼마나 많이 잃어 버렸겠는가?
지긋지긋하다.
어머니께 듣던 잔소리들이 아직도 귓가에 잔잔하다.
결국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아예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이슬비나 보슬비는 물론 소나기나 장대비에도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절대로 뛰지 않고 그냥 걸어 다녔다.
평소보다 더 여유있게 천천히...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여유있게 걸었다.
지금도 나는 비를 별로 두려워 하지 않는다.
물론 이곳 켈리포니아에는 비가 자주 오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비가 내리는데
그 빗속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닌다.
예를 들어 건물에서 나와 자동차로 갈 때까지 비가 쏟아져도 그냥 걸어 간다.
자동차 트렁크에 우산이 서너개씩 뒹굴어 다녀도 정작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찾지 않고
그냥 걸어 간다. 빗속에......
1)우산으로 때리며 애정을 표현한 친구 이야기
지난 5월에 한국에 갔을 때 선배 한분과 친구와 만나 밤거리의 빗속을 한참 걸었다.
용산역에서 내려 친구의 아파트가 있는 언덕배기까지 비를 맞으며 한참을 터벅터벅 걸었다.
약간의 술기운이 그 친구까지 나를 닮게 만들었는지 우산을 손에 들고도
친구는 우산을 펴지 않고 그냥 들고 걸었다.
제법 많이 오는 그 비를 몸으로 다 맞으며 그냥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친구가 갑자기 우산으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등판을 때리기 시작해서 머리까지도 그 까만 우산으로 때렸다.
나는 일종의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살살 피하면서 가볍게 맞을 수 있도록
몸을 잘 움직였다. 그러나 친구는 여러 차례 넌 멋있는 놈이야 하면서 계속 우산으로 나를
가격했다. 아, 왜 바보처럼 맞고 있을까? 친구는 날 때리는 것이 재미있는 것일까?
결국 친구집에 들어가 술을 더 마시고,
다시 더 마시자고 친구 와이프까지 모시고 나오는데
모두들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마지막까지 술을 더 마시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내 침실에 까맣고 낡은 우산이 하나 있었다.
우산을 보니 쇠자루가 몹시 휘어져 있었다.
내가 저 우산으로 맞았을 거라는 생각에 유심히 보니 아주 낡고 오래된 우산이였으며 자루가
완전히 구부러져 있었다.
2) 우산 속 데이트
우산은 남녀 사이의 간격을 아주 좁힐 수 있는 찬스를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함께 우산 속에 들어가 보라. 그리고 비가 쏟아지는 길을 걸어가 보라!
처음 여자 친구와 우산을 함께 쓰고 갈 때 그 가슴 속의 고동 소리를 기억해봐라
난 나보다 몇살 위인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확한 학년이나 나이 차이가- 예쁜 여학생과
만나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 그녀는 고등학교에 다녔고
돈암동 태극당에서 만나 그 여학생이 다니던 병원에도 함께 가고 -몸이 아주 약했다- 이리 저리
다녔는데, 전혀 어딜 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 여학생을 만날 때마다 비가 왔다.
어느 비오는 날
우산 속에서 조금이라도 비를 적게 맞으려면 가능한 한 둘이 밀착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가끔
씩 아주 가끔씩 그녀의 살냄새도 맡게 되는 것이었다. 비누 냄새가 섞인 아주 향긋한 냄새....
지금도 난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과 함께...
3) 우산을 들고 벌인 혈투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숙명여고 여학생 2명(인영, 은숙)과 친구들 셋이 과외 공부를 함께 했었다.
어느날 과외를 마치고 친구들과 내려오는데 동네 양아치들이 우리가 다니던 고등학교
(K)가 좋으냐 경기고등학교가 좋으냐 하면서 야지를 했다.
별명이 깨비라고 불리던 내 친구가 양아치들 서너명을 귀싸대기를 때리고 훈계를 했다.
별명처럼 겉늙어 보이고 덩치도 크고 아주 점잖게 언변도 좋은
친구의 위엄에 눌려 양아치들은 대항을 하지 못했다.
나는 녀석들에게 가지도 않고 멀찌감치 서있었다.
까불면 나도 합세하려고..
결국 우리는 유쾌하게 웃으며 그 동네를 벗어나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문제는 다음날,
과외 시간에 맞추어 버스에서 내려 걸어 가는데 마침 인영이가 앞에 가고 있어 함께
걷게 되었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골목에서 어제의 그 양아치들과 또 다른 애들까지
십여명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난 지금이나 옛날이나 상황 파악이 빠른 편이다.
인영이가 들고 있는 우산을 뺏어 손에 들고 인영을 빨리 가라고 소리쳐 보냈다.
인영이는 그날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장마철이다 보니까
언제 올지 모르는 비에 대비해 우산을 들고 있었다.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녀석들과 끌려 들어가지 않고 큰 길에서 어떻게 해보려는 나와
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십여명의 녀석들은 자전거 체인을 흔드는 놈,
긴 몽둥이를 흔드는 놈. 각각지 양아치 다운 무기들을 들고 있었고
내가 믿을 것은 우산 뿐,
많이 맞았다. 그러나 난 쓰러지지 않았다.
독립운동하면서 일본군대와 싸우는 기분으로 즐겁게 대항했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과외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고 동네 아저씨들 소리도 들리자
녀석들은 도망갔다.
난 운이 좋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반 죽게 맞는 건데...
과외 선생님댁에서 인영이가 내 상처난 등에 빨간약을 발라 주었다.
인영이 우산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고
그녀가 약 발라주던 생각만 가물가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