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친구

Cmaker 2024. 6. 22. 06:17

친구

 

새소리에 잠이 깼다. 맑고 투명하다. 어제 친구의 목소리도 저렇게 청명하게 들렸다. 친구는 대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목소리만큼은 예전과 다름없이 쾌활했다. 친구는 치료를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 싸움의 첫째는 잘 먹는 것이고 둘째는 잘 자는 것인데, 자신은 먹는 것과의 싸움은 그런대로 잘 견디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잠을 못 잔다고 했다. 하루에 한두 시간도 잘까 말까하다는 것이다.

 

건강한 친구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키가 크고 체격도 컸다. 교실 맨 뒤에 앉아 있었다. 급우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고 별로 말이 없었다. 워낙 덩치가 커서 함부로 다가가서 뭐라고 말붙이기도 힘들었다. 그맘때는 무엇이든지 크기로 가늠하지 않았던가. 6학년 때 한 반이었던 것 말고는 별로 기억에 없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또 다른 초등학교 동창생의 치과병원에서였다.

 

치과의사인 친구는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LA에 가는 날이면 친구 병원에 들려 차를 마시면서 쉬곤 했다. 그날도 예고하지 않고 불쑥 병원을 찾았다. 친구가 진료 중에 있어 기다리기로 했다. 옆에 키 크고 멋진 신사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서로 살아온 흔적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혹시 종로구 연건동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지 않았는가 물었다. 친구는 6학년 때 전학 와서 잠깐 다녔다고 했다. 치과 의사인 친구와는 교회에서 만났다고 했다.

 

6학년 1학기 시작 후 몇 달 뒤에 전학 왔다니까 한 7~8개월 같은 학급에서 공부했나보다. 어쩌면 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한 반이었던 다른 친구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유독 그 친구가 기억나는 것은 워낙 체격이 큰데다가 점잖고 어른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흐른 뒤 멀리 미국 땅에서 만났다는 것은 깊은 인연임에 틀림없다. 그 후로 가끔 만나 식사도 하고 이민생활의 애환을 함께 하며 지냈다. 그런 친구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은 치과 하는 친구였다. 그러면서 한 번 전화라도 넣어보라고 했다.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아니 망설였다. 어떤 심정인지 모를뿐더러 아직 본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공연히 전화로 이야기 나누다가 마음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가 먼저 전화 해주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에 친구가 전화했다. 자기 소식을 들었을 텐데 전화 한 번 주지 않느냐면서 껄껄 웃었다. 병자의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리고 점심을 함께 했다. 곧 항암치료를 시작하는데 몸을 튼튼하게 유지해야 잘 견딜 수 있다면서 맛있게 잘 먹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다가 다시 전화를 한 것이다.

 

하루 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다 보니까 몰골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아 그냥 집에만 있다면서 잠을 한숨도 못자고 있다고 했다. 잠을 충분히 자야 병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전혀 잠을 못 이룬다는 것이다.

 

필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항암치료를 한 차례 받았을 뿐인데 체력이 고갈되어 다시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친구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누구보다 체력에 자신이 있던 친구,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친구가 치료받을 기운이 없다니. 뒤척이다가 문득 몇 해 전 일이 생각났다.

 

친구와 데스밸리에 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기로 한 전날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심한 태풍이 몰려올 거라는 일기예보도 있었다. 예보가 있었다 해도 비바람이 몰아치지 않았다면 취소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뻥 뚫린 듯 비가 퍼붓고 있었다. 당연히 친구도 동의할 것이라 믿고 여행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전화했다. 그러나 친구는 그럴 수 없다며 혼자라도 가겠노라고 했다. 도로가 물에 잠기고 가로수들이 뿌리째 뽑혀나갔던 폭풍우 속에 친구는 홀로 데스밸리에 가서 야영을 하고 왔다.

 

친구야! 폭풍우 속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하던 자네가 오늘은 방안에서 홀로 병마와 싸우고 있구나. 그 외롭고 캄캄한 밤을 이기고 돌아왔듯이 병마와의 싸움도 반드시 이겨내리라 믿는다. 그토록 간절하게 믿고 의지해왔던 신앙의 힘으로 폭풍우 속을 뚫고 나오리라 굳게 믿는다.

 

새소리가 잦아지더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또 새 날이 시작된다. 창문을 활짝 열며 친구의 쾌유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