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친구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전철역 앞, 한 식당에서 만나 점심 먹고 이동하기로 했다. 김밥과 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안동국시를 먹고 나오다가 물 마시기 위해 물통꼭지에 1회용 종이컵을 대고 물을 따르는데 뜨거운 물이 쏟아져서 깜짝 놀랐다. 물이 컵 밖으로 넘쳐 흘렀다. 그런데 그건 물이 아니라 육수였다.
엎지른 육수가 밑에 쌓아 놓은 투고용 박스 위로 떨어졌다. 바로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내가 흘렸음을 신고하고 육수를 닦기 위해 무릎을 구부리자 직원들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알았다며 그냥 나가라고 했다. 내부가 협소한지라 내가 쭈구려 앉아 있으면 손님이나 직원들이 통행하는데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왔다. 직원인지 주인인지 한 사람이 따라나와 나를 부르더니 박스값을 물어내라고 소리쳤다. 자기네가 4만3천 원에 산 것이라며.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고 무슨 큰 죄라도 진양 몰아 세웠다. 육수를 고의로 엎은 것도 아니고 실수로 흘렸는데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입장 순서를 기다리던 손님들을 비롯해 길가던 사람들까지 큰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호기심을 발동하고 쳐다 보고있었다.
내가 ‘다 물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훼손된 것만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보고 훼손된 것과 온전한 것을 헤아리라고 했다. 자기네가 바빠서 할 수 없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손님들이 길가에서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바쁜 건 사실이었다.
길바닥에 쭈구리고 앉아 친구와 둘이 훼손된-육수에 젖은- 박스를 골라내니 7개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온전한 것 97개와 훼손된 것 7개를 구별하여 넘겨 주었다. 내게 전달 받은 주인인지 직원인지 모를 상대방은 훼손되지 않았다고 넘겨준 97개 중에서 하나가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젖었다며 골라내었다. 그래서 못쓰게 된 것이 모두 8개가 되었다.
얼마를 지불하면 되겠냐고 물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다만 얼마라도 물어주고 싶었으나 거기서 돈 몇 푼을 꺼내 주는 것도 남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다시 와서는 육수를 쏟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 어디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인지라 한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사람이 시키는대로 훼손된 것과 온전한 걸 구별했고, 그 결과 잘 해결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몇 가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첫 마디가 자기가 4만3천 원에 구입했다며, 물어내라고 했고, 큰 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다루는 형사처럼 행동하는 것이 거슬렸고, 내 나이 절반이나 되었을까 말까한 사람이 어찌나 거칠게 말하는지 어의가 없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업소를 찾은 손님이 실수로 뜨거운 육수를 따르다 엎질렀다면 손을 데지 않았는가 묻는 것이 우선 아닌가? 앞뒤를 살펴보지도 않고 무조건 훼손된 물건의 변상부터 요구하는 건 잘못된 처사라고 생각한다.
문화 차이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무조건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더 나아가 남의 잘못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필벌(必罰), 좀더 나아가 일벌백계(一罰百戒)주의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