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하나가 아니다

Socrates를 불러오다

Cmaker 2020. 4. 19. 13:43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좌우가 양극단으로 나뉘어 오로지 자기들의 주장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고 있어 서로 극심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갖고 대치하고 있는 양상이다. 중도는 없다. 중도를 표명하는 순간, 배신이 되고 적이 되는 시대이다.

 

선거가 끝났다. 개표결과도 나왔다. 낙선한 대통령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가 국회의사당을 잠시 동안 점령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사람은 싫지만 그의 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까지 눈살을 찌푸리고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선거에 의한 투표 결과를 부정하는 것은 법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정의에 대한 부정이다. 국가에 대한 반역이다.

 

한국의 현실은 좀 더 노골적이다. 고위층을 위한 사찰 기관을 새로 만들기 위해 법적인 절차를 받는 과정에서 여당 전체가 한 목소리를 내며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였다. 반대 의견을 펼치는 사람은 당에서 쫓아내었다.

또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측근들의 위법행위에 대한 수사를 펼치자 여당과 대통령 측근들은 검찰총장을 쫓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극렬하게 행동했다. 그 와중에 오히려 법무장관이 둘이나 물러났다. 한 사람은 자녀들의 진학을 위해 상장을 위조했고, 자녀들의 스펙을 위해 지나치게 부풀린 이력을 만든 것이 밝혀져 재임 도중 물러났다. 또 한 사람은 1년여를 검찰총장과 다투다가 스스로 물러나는 모양새를 갖춰 퇴임했다. 이어서 새로 등장한 법무부 장관 후보자 역시 여러 가지 위법-아직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실에 연루된 상황에서 청문회에 앉아 있다. 이뿐이 아니다. 새로 임명된 법무부 차관은 택시기사 폭행과 경찰의 봐주기식 수사가 있었다는 의심으로 끊임없이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여당과 야당은 이에 대해 날선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기원전 470~기원전 399)도 오늘날의 한국이나 미국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부패했던 시기였으며, 개인윤리의 타락이 극심했고, 정치적 상황도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서로 맞서서 싸우면서 도시국가였던 아테네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어려서 소크라테스는 세습을 위해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석공 기술을 배우면서 철학과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청년이 되어 40세까지 세 차례 전쟁터에 나가 직접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에 관한 탐구에 머물고 있던 당시 학문의 초점을 인간생활로 돌렸다. , 인간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등 인간 본질 탐구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350여년이 지난 뒤, 그리스 사상을 로마사상에 접목시키는데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키케로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공직(公職)이 자신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사회적 타협을 하는 것이라 여기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나, 어떤 연유에선지는 모르지만 50대 중반에 500명으로 구성된 원로회의 의원으로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어떤 재판에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참주들의 위헌적 유죄판결을 혼자서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만년(晩年)에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세력은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 세력이었다. 기소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당시 30인 참주(僭主)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민주정(民主政)을 시행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적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혐의였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사형을 언도 받아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당시 20대였던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哲人이 다스리는 철인정치(귀족주의)를 주창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작금의 혼란스러운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대립의 상황을 보면서 2,500년 전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정치적으로 혼란한 싸움에서 초지일관 정의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갖고 투쟁하다가 희생양이 되어 독배를 받고 세상을 떠났던 소크라테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 γνθι σεαυτόν 그노티 세아우톤)’ 소크라테스의 말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지만 그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앞마당에 새겨져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말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이 안다면서 스스로를 현자라고  외치고 다녔던 소피스트들을 향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며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던 것이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무지)을 모르기 때문에 그 상태에 만족하게 되고 더 이상의 발전이 없으며,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다. 나의 무지를 깨닫는 것에서 도전의식이 생기고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형언도를 받고 재판정에서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다. 후대의 극작가들이 그들이 공연하는 연극에서 소크라테스의 말인 것처럼 인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으며, 정치가들이 국민들에게 시민의식을 심어주기-준법정신 고취를-위해 소크라테스의 말로 인용해서 강조했음직하다. 플라톤의 저서 변론에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법정이 주장(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악법도 법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무리들이 적용한 법에 따르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주장, 자기 철학에 근거한 행동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이 따랐던 영혼의 소리(하늘의 명령)에 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