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결의(桃園結義)
중학교 시절, 일곱 명의 친구들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 유비, 관우, 장비처럼 나이를 따져 형제의 의를 맺지는 않았다. 혼란한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의 결의도 하지 않았으나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 의식을 행했다. 평생 서로 도와가며 의(義)롭게 살자고 결의했다. 학교 입학 성적이 우수한 친구들이었다. 수석, 5등, 7등, 10등으로 입학한 모두 학업성적이 빼어난 친구들이었다. 그중에서 필자의 성적이 가장 낮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1학년 1학기 성적에 의하면 등수를 끝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빨랐으니까. 그러나 졸업할 때는 성적들이 형편없었다. 아마도 내가 제일 잘했을 거다. 모의고사 성적이 전교 32등 정도 했으니까. ㅎㅎㅎㅎ.
한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친구는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대학 졸업 후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했다. 대기업보다 규모가 작지만 중소기업보다는 큰 업체를 중견기업이라고 부른다면서 자기 회사를 중견기업이라고 자랑했다. 임원으로 승진했을 때, 축하한다고 하자 친구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 두 해 더 일하면 퇴직해야 한다면서 승진한 것을 기뻐하기보다 직장에서 쫓겨날 일을 걱정했다. 한국에서 만날 때마다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안한 심경을 토로하곤 했다.
승진한 이듬 해 8월 말에 친구는 평생 몸 바쳐 일 해온 회사로부터 12월까지 봉급을 줄 테니까 9월부터 나오지 말라는 퇴직 명령을 받았다. 친구는 매일 술을 마셨다. 부인과 아이들은 지방에 살고 있었고 친구 혼자 서울에서 살다 보니 퇴직 후의 저녁 시간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을 떠나던 날도 옛 부하 직원들과 술을 마셨고 집에서 홀로 자다가 누워 있던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12년 전 이맘때 일이다.
중학교 수석으로 입학했던 친구는 연락이 없다. 친구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만나곤 했는데 필자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소식이 끊겼다. 또 한 친구는 뒤늦게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생활을 거쳐 지금은 자기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7명 중 유일하게 한국에 살고 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를 방문하는 내게 친구는 상당히 많은 돈을 전해주라며 건네주기도 했다. 친구가 사업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도우려는 마음이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미국 사는 친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대접을 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머지 넷은 모두 LA 인근에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시카고에 살다가 80년대 말에 LA로 이주했다. 시카고 살다 온 친구 중 한 명은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미국에 갈 거라고 했는데 우리가 대학 2학년 올라가던 해 봄에 미국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자도 미국 정착이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민 초기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을 보살펴 주었다. 단 한 번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어렵고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도와주었다. 한국에 살던 필자는 90년대 초,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친구는 2010년 경 LA로 이주했다. 친구들이 가까이 살고 있지만 생활에 쫓겨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집안의 경조사 때나 얼굴을 보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송년회를 겸해서 만나곤 했다.
몇 해 전,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가 부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짧은 기간 머물다 갔지만 친구 덕분에 이곳에 사는 중학교 동창생들끼리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한 친구가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 예배도 보고, 바닷가도 찾고 공원에서 BBQ도 하고 골프도 쳤다. 그리고 친구를 중학교 동기생 모임의 회장으로 선출했다. 한국에 살지만 회장이 된 친구는 해마다 LA를 방문한다. 뿐만 아니라 LA 모임이 있다고 연락하면 꽃을 한 아름 보내오기도 했다. 이 친구가 11월 중순 LA를 방문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골프 일정을 잡았고, 친구들 몇몇은 데즈밸리를 함께 가겠다고 하며, 필자는 친구의 기호에 맞춰 박물관이나 공원을 안내할 계획이다.
우리는 철없던 시절에 결의를 맺으며 약속했던 대로 친구가 어려울 때 서로 도와가며 우애 있게 살고 있다. 5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어릴 적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