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생과 점심을
2001년에 고등학교 동창생의 생일 파티에서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내 초등학교 동창생은 생일을 맞은 고교 동창생의 동네 친구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는 유명한 아역 배우였다. 이 친구가 주연으로 활약했던 화랑 관창이라는 연극을 보기 위해 남산 입구에 있었던 드라마센터로 전교생이 단체 관람을 갔던 기억도 있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혹시 누구 아니냐고.
그는 그렇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수업 도중에 방송국 차가 와서 모시고 가곤 했고 학교가 단체로 그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단체로 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와 나는 4학년 때 한 반이었으나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았고 어쩌다 나와도 잠깐 있다가 가버렸으니까.
그리고 후에 TV에 등장하기도 했다지만 집에 TV가 없었기에 그를 영화나 연극에서도 보지 못했다. 단지 드라마 센터에서 단체 관람을 가서 그가 “왕자님!” 하고 외치던 그 공명이 들어간 꽉 찬 음성이 기억에 있을 뿐이다.
그가 학교를 졸업했는지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4학년 때 한 학급이었다는 기억 밖에.
4학년 때인 1964년의 기억을 더듬어-초등학교 시절의 그를 떠올리며 - 그를 보니 세월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까맣고 숱이 많았던 머리는 온데 간데 없고 완전 대머리 아저씨가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 친구는 갖은 고생 끝에 사업에 성공해서 직원들이 100명이 넘는 기업을 일궜으며 10,000sq이 넘는 매장이 12개나 되는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친구는 너무 기뻐했다. 전혀 기억속에 없는 사람이나타나 초등학교 동창이라며 자신을 기억해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후로 나와 한 직장에 있었던 다른 초등학교 동창도 불러내고 치과 의사로 개업의인 친구도 불러내 초등학교 동창 모임을 몇 번인가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른 친구들과의 모임은 흐지부지되고 친구와 나는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둘은 주말이면 모여 산을 올랐다.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셋이.
2004년 7월 다니던 회사에서 짤려 실직 상태에서도 친구는 함께 산을 오르면 나를 걱정해주기도 했고 내가 그해 9월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는 모자라는 인수자금 10만 달러를 선뜻 빌려주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 진행되냐고 묻길래 그냥 10만 달러가 부족하다고 말했을 뿐인데 친구는 현금을 차용증도 없이 빌려 주었다. 천천히 갚으라면서.
난 10개월만에 그 돈을 갚아 버렸다.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기에.
그리고 2006년 나의 큰아들이 한국에서 군복무를-논산 훈련소 조교로 복무했음- 마치고 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미국으로 불러 들이자 친구가 자기 회사에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아니 누군지 어떤 놈인지도 보지 않고 무조건 쓰려고 하냐니까 네 아들이면 무조건 오케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들은 미국으로 들어오자마자 친구 회사에서 12개의 매장을 관리하는 매니저로 일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일주일에 한 번 산에 가고 가끔 부부동반으로 만나 밥도 먹으면서 재미나게 지냈다.
그러던 2007년 직원들 봉급을 줘야 하는데 1만 달러가 부족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1만 달러만 빌려 달라고. 친구의 첫 마디를 듣고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회사를 인수할 때는 빌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10만 달러를 빌려줬던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하다니.
“이게 마지막이다. “
친구가 나를 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데 실망했다. 난 무조건 빌려줄 줄 알았기에.
내 입에서 바로 튀어 나왔다. 내 생각이 아무런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응 그러면 됐다. “
그리고 은행으로 달려가 만기가 되려면 한참 남은 CD를 해약했다. 언젠가 비상시에 쓰려고 10만 달러를 CD로 묻어 둔 것이다.
돈을 찾아 은행문을 나서는데 친구가 전화했다.
“친구야 와서 돈 갖고 가라. “
“아 괜찮아. 방금 은행에서 CD찾아서 나오는 길이다. “
“야! 갖고 가래니까. CD 중도 해약하면 손해잖아. “
“괜찮아. 내 돈 아끼려고 자네에게 돈 빌리려고 해서 미안하다. “
그리고 그후로 친구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가끔 친구가 전화해서 밥먹자고 하면 식사를 하면서도 옛날 같이 대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산길을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고 가끔은 부부 동반으로 만나 맛집을 찾아 다니던 우리가 전혀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후에 들으니 내 아들은 친구회사의 한국지사장으로 나가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4년 아들이 회사를 그만 두고 자기 사업을 한다고 했다. 자세한 상황은 물어 보지 않고 아들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2017년 한국에서 아들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가 친구 얘기가 나왔다. 아들은 친구가 자기를 친 아들처럼 대해주었다면서 회사를 퇴직할 때 꽤 많은 돈을 줘서 그 돈이 자기 사업 자금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친구에게 고맙다는 전화 한 통화 하지 못했다. 그저 마음 속으로 고맙다고 생각하고 그의 사업이 잘 되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어제 2018년 7월 28일(토) 친구가 전화했다.
“친구야!”
한참을 얘기했다. 친구가 말했다. “점심 함께 할까 우리?”
이렇게 해서 우린 다시 만났다. 신나게 떠들고 밀린 얘기 나누다가 친구가 말했다. 우리집에 가서 차 한 잔 할래?
그래 가자.
친구는 내가 주말이면 찾아가는 Pacific Hwy 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살고 있었다. 게이트 단지로 엄청나게 큰 집들이 바다를 향해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다. 친구의 안내로 단지룰 한 바퀴 자동차로 돌아보고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우린 또 신나게 떠들었다. 난 5시에 한국에서 보이스카우트 지도자 생활을 함께 했던 분들과 약속이 있어 3시쯤 서둘러 일어서야 했다.
찬구는 미국의 사업체는 다른 사람에게 팔았고 건물은 또 다른 업체에 임대했으며 한국의 비즈니스만 운영하고 있지만 직원들에게 25%의 지분을 주고 다 맡겨 사업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아들은 미국의 영화 배우이며 제작자이며 감독으로 맹활약하고 있으며 딸은 오렌지커운티 Attorney로 일하고 있으니 자식 농사도 잘 지었고 손녀가 둘 있다고 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행복하냐고.
친구가 말했다. 행복하지 않다고.
요즈음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다며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들 수 있다고 했다.
오마이갓!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누가 행복한 거냐고?
행복은 돈도 자식들이 훌륭하게 되는 것도 우리를 찾지 않는다.
행복은 내가 스스로 찾는 것.
나는 그가 손흔드는 것을 보면서 살살 악셀을 밟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나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