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하나가 아니다

아무거나의 미학

Cmaker 2018. 3. 23. 01:56


 

   식사 약속을 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묻는 사람에게 정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아무거나'라고 한다.

 

   언젠가 세 사람이 만나기로 했는데 염소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모두 좋다고 했다. 만나서 염소 전골을 시켰다. 그러나 한 친구는 먹는 척만 하고 손도 대지 않고 다른 반찬하고 밥만 먹고 있었다. 염소를 먹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두 사람이 그쪽으로 방향이 쏠리니까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고 따른 것이었다. 음식을 시킬 때라도 자기는 다른 음식을 주문했으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늘 이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이렇게 내 의사를 표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의사에 따르는 심리는 어떤 것일까? 이런 행위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는 양보, 그 다음이 배려이다.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 양보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식사 한 끼를 하더라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먹고 싶은 것을 먹게 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겸양지심, 사양지심의 마음이다. 더 나아가 보자면 타자본위의 정신이 담긴 속 깊은 배려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내가 생각하기 싫으니까 네가 정해.’ ‘세상에 신경 쓸 일이 많은데 밥 한 끼 하는 것까지 신경 쓰면서 살아야 하냐?’는 귀차니즘의 발로이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식사 한 끼조차 결정할 판단력이 부재한 것이다.

 

   이처럼 식사 한 끼 조차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아니 결정하려 들지 않고 남에게 맡기려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햄버거를 시킬 때 우리는 간단명료하다. 치즈버거하나. 그러면 바로 질문이 들어온다. 양파를 넣을까 말까. 넣어달라고 한다. 이어지는 질문은 음료수는 안 시키니? 응 필요없다. 이어서 여기서 먹을 거냐 가지고 갈거냐? 여기서 먹는다. 이 정도에서 끝난다.

 

   그러나 아들은 길게 어떻게 해달라고 늘어놓는다. 양파는 살짝 익히고 토마토 빼고 케첩은 내가 뿌려 먹을 테니까 미리 넣지 말고. 여기서 먹지만 남으면 가지고 가게 포장해 달라. 그리고 물을 한 잔 주는데 얼음을 넣어서 주고 레몬을 하나 넣지 말고 따로 주기 바란다.

 

   아이는 자기가 음식을 어떻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고 또 그렇게 먹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비해 우리는 대충 한 끼 때우면 된다는 생각에 대충 시켜서 배를 채우는 것이다.

 

   비단 먹는 음식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미래에 잘 살기 위해 노후에 편안하게 살기 위해 오늘은 대충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대충 살다가는 평생 대충 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아야 내일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수 있다.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힘들게 살아서는 안 된다. 오늘 충실하게 내가 가진 것을 누리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내일도 그에 맞는 보상이 돌아오지 않겠는가?

 

   타인에 대한 배려, 양보가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점심 한 끼 먹는 정도는 무엇을 먹을까를 정하는 데 내 생각대로 그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얘기하자. 그리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한 끼의 식사일망정 즐기며 먹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만들자. 그 한 끼의 식사가 내 인생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주고 인생의 맛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