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maker 2010. 5. 6. 03:49

용서

식이 끝나기 무섭게 봉균은 새색시와 김포공항으로 떠났다. 제주도 가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식사도 못하고 서둘러 출발했다. 병일과 친구들은 하객들로 붐비는 식당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갈비탕을 먹다가 찬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어디가서 목이라도 축여야지. 오랜 만에 다 모였는데.”

 

일단 여기서 한 잔 하자고. , 잔 받아라.”

 

민수가 말을 받으며 찬후에게 잔을 내민다. 신랑, 신부 측 하객들이 모두 뒤섞여서 갈비탕 먹기에 바쁘다. 그 와중에 떡이랑 잡채랑, 전 등을 식탁에 차리느라고 아주머니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부지런히 음식을 넣고 입을 우물거리던 평두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병일에게 빈 잔을 내민다.

 

병일아, 한 잔 받아라.”

 

, 평두, 너는 여전하구나. 잘 지내지?”

 

아까부터 누군가를 찾고 있던 병일은 평두가 준 잔을 받으면서도 눈길을 식당 입구에 두고 있었다. 꼭 오기로 한 사람을 못 만나서 찾고 있는 듯 했다.

 

수원에 박혀서 열심히 직장과 집을 왔다 갔다 하고 있지.”

 

빠르긴 빠르구나. 네가 대학 간다고 날 찾아 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 써 졸업해서 취직을 했다니.”

 

그래, 내 점수로 어느 대학 무슨 과에 원서를 낼 수 있는 지 네게 물으러

가서 만나고는 처음이지. 그래, 아직도 고 삼 담임하냐?”

 

아냐. 지금은 연구주임을 맡고 있어 담임은 하지 않는다.”

 

연구주임은 뭐하는 거냐? 뭘 연구하는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민수가 끼어 든다.

 

주로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려고 학생들에게 효과적인 학습을 시키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는 부서야.”

 

어떻게 하면 일류대에 많이 합격시킬 수 있나 연구하는 데구나.”

 

민수는 여전히 음식을 씹으며 말참견에도 분주하다.

 

, 봉균이 자식은 장가 안 갈듯이 굴다가 예쁜 색시 만나더니 약혼식도 하지 않고 바로 결혼식을 하니, 참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야. . 선생 님.”

 

찬후가 말하다 말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외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

 

모두 눈이 커진다. 찬후가 바라보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중학교 시절상업을 가르쳤던 나섬렬 선생이 식당에 들어서서 앉을 곳을 찾고 있었다. 병일이 앞으로 나가 나섬렬 선생 손을 잡아 자리에 앉도록 도와주며 말한다.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바쁘셔서 못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일찍 와서 앞자리에 앉아 있었네. 자네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 칠 뻔했지. 알려줘서 정말 고맙구먼. 평생 중학교 선생을 하니까 제자들이 잘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네. 병일이 자네나 가끔 만나며 지내는 거지. 자 네들은 뒤에 있었나 보지? 모두 잘 있었나?”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나 선생을 맞이한 후 다시 앉았다. 평두만 앉은 채로 있었다. 평두는 나 선생 쪽을 바라다보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중학교 이 학년 때 평두와 병일은 나섬렬 선생 반이었다.

박병일, 진평두!”

!”

 

두 사람은 오늘 종례 시간 전까지 난로 뚜껑을 구해다 놓는다.”

 

!”

 

난로 뚜껑이 없어졌다. 어제까지 멀쩡하게 잘 있던 난로 뚜껑이 아침에 와보니 사라져 버렸다. 아쉬운 대로 난로 뚜껑 대신 주전자를 올려놓았지만 석탄의 뜨거운 기운이 가열되어 물이 끓기 시작하면 그 소리를 견디기 어려울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양이 아니다. 가끔 학급에 비품이 없어지면 담임은 병일과 평두에게 찾아오라고 시켰고, 그 때마다 둘은 어디선가 없어진 물건을 구해 왔다.

 

, 저 꼰대는 씨발 맨날 우리 보고 찾아오라고 하냐? 난로 뚜껑을 어디

서 구한단 말이냐?”

 

평두는 씩씩 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난로 뚜껑 하나 못 구하겠냐?”

 

병일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다른 학급에서 훔쳐다 놓거나 용인 아저씨들이 일하는 창고를 뒤져서 구해다 놓는 것. 다른 학급에서 훔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 눈뜨고 있는데 들어가서 집어 올 수 없을 뿐더러 불에 달구어져 있는 뚜껑을 무슨 수로 들고 온단 말이냐? 학교가 파한 후에 학생들이 귀가한 뒤에는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선생은 종례 전이라고 못을 박았다. 반드시 종례 전까지 구해야 했다.

박병일, 진평두! 수고했다. 어디서 찾았나?”

 

, …………….”

 

평두가 벌떡 일어나서 뭐라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교실 문이 열리며 삼 반 담임인 정 선생이 한 학생을 앞세우며 들어선다.

누구야? 우리 반 난로 뚜껑 집어간 놈이?”

 

선생님, 저 자식입니다.”

 

정선생보다 한 발 앞서 들어오던 삼 반 학생이 마침 일어나 있던 평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저 난로 뚜껑을 도로 우리 반에 갖다 놓고, 너 이 자식, 이리 나와.”

 

교단 위에 서 있는 나 선생을 무시하고 정 선생은 무서운 기세로 평두를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나 선생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가는 눈이 점점 더 찢어지며 가늘어지고 있었다. 평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나갔다. 이 때 병일이 소리쳤다.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 평두는 잘못이 없습니다.”

 

넌 뭐야? 병일이 아냐. 네가 그랬다고?”

 

. 제가 옮겨 놓았습니다.”

 

정 선생은 폭격을 위해 하늘 높이 올랐다가 목표물을 잃어버린 폭격기처럼 머리를 확 돌리며 소리쳤다.

 

어쭈구리. 자식들이 아주 놀고 있구먼. 둘 다 이따 종례 끝나고 교무실로 와!”

 

정 선생은 나 선생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까닥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 선생이 나가자마자 나 선생은 평두와 병일을 앞으로 불러내더니 뺨 위에 손을 대개하고 때리기 시작했다. 소위 엑스커버라고 부르는 것으로 오른 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왼뺨에 대고 왼손은 오른 뺨에 대게 한 후 주먹으로 손바닥 위를 가격하는 것이다. , 나 선생은 학생들의 양 뺨을 가리고 있는 손바닥을 때리는 것이다.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뺨을 직접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는 덜 아플 수 있다. 또 때리는 사람은 주먹이 닿는 면적이 넓고 편편하기 때문에 때리는 즐거움을 배가 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때리고 맞는 광경을 보며 저마다 즐기거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교실은 공포 분위기였다. 나 선생은 한참을 정신없이 때린 후 둘을 교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종례를 마치고 나 선생은 교무실로 평두와 병일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 시간 이상 설교를 했다.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학급의 명예와 본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들이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다. 한 말을 되풀이 하면서 둘의 마음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병일의 귀에 나 선생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는다. ‘무조건 구해오라고 한 사람은 누구냐? 그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구해 오라는 것 아닌가? 훔쳐오라는 뜻도 담겨 있지 않은가? 그래 놓고 이제 와서는 훔쳐왔다고 때린다.’

어떻게 된 거야. 병일이 네가 말해봐.”

 

정신없이 생각에 빠져 있는 병일에게 나 선생이 물었다.

 

“3반 체육시간에 둘이 들어가서 혼자 남아 있던 주번하고 제가 얘기하는 사이에 평두가 뚜껑을 들고 왔습니다.”

 

남의 교실에서 그렇게 들고 오면 안 돼지. 용인 아저씨한테 얘기해서 갖고 와야지. 안 그러냐?”

 

, 잘못했습니다.”

 

평두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 선생이 이번에는 평두를 향해 물었다.

 

평두야, 네가 미워서 때렸겠냐?”

 

…………………….”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라. ?”

 

평두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 하지 않고 평두는 고개를 똑 바로 들고 나 선생에게 말했다. 그러나 너 이다음에 보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선생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 때 교무실에 들어서던 정 선생이 불렀다.

 

, 너희 둘 이리와 봐.”

 

둘은 정 선생 책상 앞에 가서 고개를 숙이고 섰다.

 

, 인마. 너희들 다시는 그러지 마라. 알겠지.”

 

.”

 

가도 좋다.”

 

학급까지 찾아와 죽일 듯이 소리치며 날뛰던 정 선생은 아주 부드러워져 있었다. 봉균이 누나를 좋아 하고 있던 정 선생이 봉균이 누나를 만날 때 따라 나간 봉균이와 병일에게 몇 차례 빵을 사주며 사적으로 친밀감을 표시한 사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병일은 알고 있지만 평두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오 수지큐

 

이주일이 엉덩이를 쭈욱 빼고 디뚱디뚱 거리며 무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극장 안의 모든 사람이 갑작스런 이주일의 등장에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예식이 끝난 후 피로연 식당에서 몇 잔 걸친 병일과 친구들은 나 선생을 모시고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겨 청요리에 배갈을 잔득 마셨다. 그리고 호기를 부리며 들어선 극장식 식당이었다. 낮부터 마신 술로 너나없이 취한 눈으로 이주일이 쏟아 뱉는 어눌한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환호하고 있었다. 극장식 식당에 들어 와서도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 평두가 갑자기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 선생에게 달려들면서 외쳤다.

야이 씨발 놈아! 네가 무슨 선생이야? 개새끼.”

 

무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친구들은 미처 듣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 했는지 모른다. 나 선생은 벌떡 일어났고 나 선생 곁에 있던

병일이 평두를 잡아끌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 인마 암만 취해도 그렇지. 너 왜 그러냐?”

그 씨발 놈이 선생이라고 우릴 얼마나 줘팼냐? 개새끼. 이가 갈린다.”

평두야, 나 선생만 때렸냐? 그 때 선생들 다 때렸잖아.”

아냐, 저 새끼가 날 특히 미워했어. 내가 돈 없고 가난한 집 자식이라고 얼마나 팼는지 아냐? 넌 몰라. 새끼야. 수업료 못 내서 쩔쩔매고 있을 때 돈 갖고 오라고 패던 자식이야.”

 

그 땐 다 그랬어. 수업료 납부 실적으로 교사 평가를 하던 시절 아니냐? 평두야! 그때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도 그래.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수업료 납부 실적이 교사 평가 항목 중의 하나야.”

 

아무튼 저 새끼 때문에 내 인생 조졌어.”

 

병일은 평두를 택시에 억지로 태워 보냈다. 택시가 멀어져 갈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병일은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평소에 피우지 않던 담배를 평두와 이야기 하며 한 대씩 나눠 피웠던 모양이다. 열다섯 살의 어느 봄날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날도 평두와 병일은 담배를 피우다 헤어졌다.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던 봄날 평두와 병일은 곡마단 공연을 보고 나와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중학교 삼 학년이었다. 평두는 가출을 결심했다며 자신이 입던 교복을 병일에게 주었다. 똑딱 단추가 달린 나팔바지와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하복 윗도리를 주면서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 서너 개비 이상 줄담배를 태우고 나서 둘은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병일은 왜 그래야 하는 지 이유를 묻지 않았고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나 평두는 병일이 선생으로 근무하는 학교에 나타났다.

병일은 고 삼 담임으로 대학 원서를 쓰기 위해 학부모 면담을 연일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박 선생님! 여기 학부형이 오셨네요. 저기 저 분이 박 선생님입니다.”

 

교감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선 사람은 평두였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팔자 주름이 깊이 패어진 평두는 병일이 담임을 맡은 아이들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보였다. 외모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나 목소리도 사십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노숙해 보였다. 병일은 약간 긴장하며 의자에 일어서서 평두를 맞이했다.

 

, 평두야. 너 웬일이냐?”

 

언제 끝나냐?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자.”

 

, 그래? 조금 있어야 하는데

 

걱정 마 기다릴게. 혹시 대학 배치 사정표 있으면 한 장 줘봐라. 기다리면서 그거라도 보고 있게. ”

 

사정표 여기 있다. , 누가 대학 가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날 예정된 학생들과 면담을 마치고 둘이 근처 식당에 앉았다. 잔에 소주를 따르며 병일이 물었다.

 

, 평두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간간이 소식을 듣긴 했어도 사실 유무를 확인할 길은 없었지. 너랑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소문대로야.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뒤늦게 철들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까지 얻어서 예비고사도 봤고 성적에 맞는 대학 가려고 널 찾아 온 거야.”

 

, 평두 너 대단하구나.”

그날 이마를 맞대고 연구하여 신설되는 단국대학교 천안 분교 경영학과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오늘 봉균의 결혼식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평두를 달래서 집으로 보내고 들어오니 여전히 친구들은 쇼에 정신 팔려 있었고 나 선생은 술기가 확 가신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평두가 술이 취해서 그만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아냐. 내가 평두 맘 다 안다. 내가 너무 심했어. 그 때 선생 초년병 시절이었거든. 언제 기회 있을 때 다시 한 번 평두랑 만났으면 좋겠다. 난 오늘 이만 갔으면 좋겠는데. 자네들끼리 더 즐기다가 오지.”

 

, 그러시면 선생님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택시 타면 되니까요.”

아냐. 자넨 친구들이랑 더 있다가 오라구. 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아네요. 저도 가는 길이니까 선생님 먼저 모셔다 드리고 가면 되지요.”

둘이 간다고 일어서니 찬후와 민수도 따라 나섰다.

 

나 선생을 내려 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병일은 나 선생과의 인연을 떠올려 본다.

중학교 일 학년을 마칠 때 쯤 큰 집에 놀러가서 하루 자고 온 다음 날 대학에 다니던 사촌 형이 학교로 와서 담임선생을 만나고 갔다. 큰 집에다가 교칙 등

이 적혀 있고 학생증이 들어 있는 학생수첩을 놓고 왔는데 거기서 전당포

용지가 나왔던 것이다. 중학교 일 학년 아이의 수첩에서 전당포에 시계를 맡

긴 용지가 나왔으니 집안이 뒤집어 질 수 밖에. 결국 병일의 생활상과 학교

성적이 집안에 공개 된 것이다. 본인은 입학 성적이 저조했음에도 성적이 우

수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을 일삼고 있으며 학업 성적이 학급에서

60 명 중 58, 그래서 이 학년 진급을 하면서 내린 집안의 결정이 담임을

맡은 나 선생에게 과외를 하는 것이었다. 큰 아버지와 사촌 형, 그리고 어머

니가 조사한 결과 나 선생은 상업과목 선생이지만 과외 하는 학생들 성적

을 올리는데 선수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선생 집은 돈암동에서 미아리 고개로 넘어가는, 전차 종접이 있었던 곳이 아니고, 정릉입구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있는 한옥 중의 하나였다. 학교가 파하고 나 선생 집에 모이는 아이들은 모두 삐리삐리한 녀석들이었다. 신현국, 홍석표, 그리고 서너 명이 더 있지만 얼굴은 물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에 닷새 매일 두 시간씩 공부했는데 솔직히 병일은 아직도 그 때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과외 수업이 끝난 후에는 나 선생은 학생들과 함께 화투를 쳤다. 주로 도리짓구땡을 했고 가끔씩 섰다를 했다. 주로 동전을 갖고 놀았는데 나 선생이 따면 호떡을 사다 먹었고 학생들이 따면 각자가 챙겼다. 여기서 병일이는 화투를 제대로 익혔다. ‘삥구장 집고 따라지’. ‘삼팔구 집고 장땡’, ‘쌕쌕이 집고 망통’, ‘쭉쭉팔 집고 갑오’, 등 숫자를 편하고 발음하기 좋게 변형하여 부르기도 했다. 또 족보를 완전히 익혔다. 삼팔 광땡, 장땡으로 시작해서 같은 패 두 장을 집으면 땡이 된다. 그리고 갑오, 구사, 장사, 쌔육(4, 6), 삥구(1, 9), 장삥(10, 1), 사삥(4, 1), 알이(1, 2), 병일의 인생에서 그때처럼 열심히 화투를 친 적은 없었다. 나 선생에게 병일은 공부만이 아니고 화투치기도 배웠다. 물론 성적이 향상된 것은 인정한다. 반에서 바닥을 치던 성적이 중간 정도를 늘 유지했으니까. 시험 때가 되면 영어 책을 펴 놓고 괄호 치기와 받아쓰기 등을 많이 했다. 병일은 멋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밑줄을 치고 괄호를 쳤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생각하니 그 때 괄호한 것과 밑줄 친 것들이 시험에 나온 문제들의 답이었다. 수학도 마찬가지로 그랬나 보다. 병일은 아직도 수학은 어떻게 그 답을 알려주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알려주었을 거다. 그 때 과외 하던 모든 아이들이 시험을 봤다 하면 영어, 수학 점수는 백 점 아니면 구십 점 이상이었다. 병일만 칠십 점이나 잘하면 팔십 점을 얻었다. 그 정도로 병일은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문제나 답을 알려주는데도 그것이 문제이고 답인 줄도 몰랐으니까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병일은 삼학년 봄에 과외를 그만두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진짜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즐겨 피우던 담배도 끊고 학원을 다니며 영어와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노력으로 중학교 졸업할 때는 전교 삼십 이등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위 일류 고등학교라고 부르는 K고로 진학할 수 있었다.

봉균이 결혼식날 이주일 쇼를 보고 헤어진 후 이십여 년이 흘렀다. 평두는 대한민국의 일류기업에서 부장까지 진급한 후에 회사를 나와 자기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고 병일은 미국에 살면서 한국을 왔다갔다 하며 사업을 하고 있었다. 병일이 한국에 출장차 들렸던 어느 날 평두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병일아! 여기다.”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평두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선생님도 모시기로 했다. 마침 우리 동네에 사셔서 가끔 만나서 소주 한 잔씩 하고 지내고 있지. 선생님은 칠십을 넘기셨는데도 여전히 약주를 잘 하시는 편이야.”

 

? 나 선생님이 오시기로 했다고?”

 

병일은 깜짝 놀랐다. 이십여 년 전 봉균이 결혼식에서 만났을 때 학교 다닐 때 왜 때렸냐고 달려들었던 평두가 나 선생님과 가끔 만나며 살고 있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웨이츄레스의 안내를 받으며 삐쩍 마른 노인네 한 분이 우리 자리로 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 그 노인네가 나 선생이었다. 얼굴은 온통 주름 투성이였고 어깨도 약간 구부정한 듯 했다. 무엇보다도 병일을 놀라게 한 것은 나 선생의 걸음걸이였다. 언제나 씩씩하게 앞을 향해 돌진하듯 걷던 나 선생이였다. 한 발 한 발 내디딛는 걸음걸음이 제 임무를 다하고 폐기처분을 기다리는 종마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 병일과 평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두가 앞으로 나서며 나 선생께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하면서 나 선생을 자리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말 오래 간만입니다. 안녕하시지요?”

 

인사하는 평두와 병일의 손을 오른손 왼손으로 각각 잡으며

 

그래 모두 잘 지내고 있지? 평두 자네야 가끔 만나고 있고, 병일이는 정말 오랜 만이지.”

 

모두 자리에 앉았다.

 

소주 다섯 병을 잠간 비웠다. 나 선생도 술잔을 앞에다 놓고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따르는 대로 잔을 비웠다. 배불리 음식을 잘 먹고 취기도 어느 정도 되어 식당을 나서는데 나 선생이 한 잔 더 사겠다고 제안을 했다. 병일과 평두도 어차피 그냥 헤어질 생각은 없었던지라 기꺼이 나 선생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근처의 맥주를 파는 퓨전 레스트랑에 들어갔다. 셋은 술 배가 따로 있다며 맥주를 마셨다. 평두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쉬지 않고 마시며 떠들었다. 나 선생은 평두의 재미없는 얘기를 들으면서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병일은 맥주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한 모금씩 넘기고 있었다. 노인네가 저렇게 마셔도 괜찮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아직 10시가 되지 않았다. 6시에 만났으니까 네 시간 가까이 먹고 마시고 있는 것이다. 숙소까지 어떻게 가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평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이 씨발 놈아 네가 선생이냐? 맨날 때리기 밖에 더 했냐? 내가 가난한 집 자식이라고 개 패듯이 때렸지.”

 

나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용하게 한 마디 했다.

 

미안하네. 내가 선생을 처음 시작할 때라 철이 없어서 그랬네. 이제 그만 용서 하게나.”

 

그래도 평두는 계속 외쳤다.

 

허구한 날 때려, 내 이를 갈았다고 이 담에 보자고.”

병일이 나 선생을 모시고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는 평두의 운전기사에게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하고 안으로 돌아오니 평두는 화장실에서 왝왝 거리며 토하고 있었다. 평두의 등을 두드려주며 병일이 말했다.

 

평두야. 그만 하면 됐다. 나 선생님, 이제 그만 용서해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