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엔젤레스에 내리는 눈 2
미국에 도착하여 이 친구, 저 친구 집을 전전하며 얹혀 지내던 영일이 페인트 칠하는 친구 따라 다니
며 한 달간 모은 돈을 갖고 방 하나 얻어 자취라도 할 생각으로 신문을 보고 찾아간 집이 수지네 집이
였다. 당시 수지는 방 네 칸 짜리 집에서 방 두 개를 세주고 월세를 받고 있었다. 영일이 수지를 처음
만나던 날, 그녀는 자신이 기지촌 출신의 여인이 아님을 알리기 위하여 여러가지 노력을 경주했다. 자
신의 아버지가 대한민국의 평통위원이며 지방 유지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앨범을 들춰가며 아
버지 자랑을 늘어 놓았다. 앤디 아빠를 만나 결혼하게 된 사연도 소상하게 들려 주었다. 당시 앤디 아
빠는 젊은 미공군 장교였으며 대학 3학년 때 봉사 다니던 고아원에서 처음 만나 대학 졸업과 함께 결
혼했노라고 했다. 앤디 아빠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부모님은 집안에서 내�았으며 다시 돌아 올 생각
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그의 달콤한 말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에 그
만 흠뻑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에 와서 결혼했고 결혼식을 마치고 몇달 후에 아기까지 낳게
되었다. 그녀 손에 들려 있는 타들어가는 담배를 보며 영일은 그녀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며 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는 짐을 싸들고 수지네 집을 찾았던 두 번째 날,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 앨범을 들춰
가며 학창 시절을 이야기를 하는 수지를 보며 영일은 그녀가 정말 양가집 규수였다고 단정짓게 되었
다. 서울의 명문 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 대학교, 그것도 영문과를 졸업한 그
녀가 기지촌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굳혔다.
돈을 한 푼이라도 모을 생각에 자취를 시작했으나 두어 주일 지나면서 부터 밥을 해먹는 날보다
사먹는 날이 더 많아지고 두어달 지나면서는 아예 집에서 밥을 해먹지 않게 되었다. 이런 영일을 보고
수지가 아침, 저녁 하루에 두끼를 집에서 먹고 한 달에 백 달러만 더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한
달에 백달러, 하루 삼 달러 삼십 삼 센트,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영일은 오케이
했다. 집에서 여자가 해주는 밥을 먹어 본 지가 언제냐? 매일 아침, 일찍 일나가는 영일을 위해 수지
는 정성스럽게 상을 차려 주었다. 따뜻한 국 한 그릇에 생선 토막, 김치, 김, 멸치 볶음,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 날마다 반찬을 이것 저것 준비해서 만들어주는 상차림을 보며 영일은 수지
가 제 아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가끔 저녁은 앤디와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열살을 갓 넘긴 앤디는
아주 예쁜 소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한국말로 곧잘 이야기를 하던 앤디가
중학교에 가면서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어로만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수지네 집에서 생활한 지 서너달 쯤 지났을 때, 수지가 조용히 할 말이 있다면서 커피나 한 잔 하자
고 했다. 수지는 커피를 마시며 연신 줄담배 피고 있었다. 영일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
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이제나 저제나 수지가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려도 별 다른 얘기
가 나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영일이 입을 열었다.
“뭐 하실 말씀이 있다면서요?”
“아, 예, 영일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이 아주머니가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씀이신가?’ 생각하면서 영일은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예, 아주 고마운 분이시죠. 제게 앤디 엄마 같은 분이 없었다면 무척 힘든 이민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 인사치례나 들을려고 여쭌게 아니고요. 혹시 저를 여자로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어, 이건 아닌데.’ 영일은 당황스러웠다. 이 난국을 도대체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아주 훌륭한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앤디에게 하는 걸로 봐서는 엄마로서 더 이상 잘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영일 씨는 저를 여자로써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데 그런 식으로 답변하시면 어떡해요?”
‘여자? 아니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제가 수지 씨를 여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지요. 또 저는 한국에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사람 아닙니까?”
“그럼 영일 씨는 평생 이렇게 사실 건가요? 영주권도 없이 이제 곧 불법체류자가 될텐데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실 건가요?”
“물론 아니지요. 얼마간의 돈을 모아서 제 가게를 하나 갖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영주권도 만들어야겠지요.”
“그럼, 저와 결혼하시면 영주권 문제는 바로 해결되지 않겠어요?”
“한국에 아내가 있는데 어떻게 수지 씨와 결혼한단 말입니까?”
“물론 부인과는 이혼을 하셔야지요. 그리고 저와 결혼해야지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수지 씨와 결혼하지 않고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요.”
“그럼 오늘 제 얘기는 듣지 않은 걸로 해주세요. 저는 다만 영일 씨에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
을 주기 위해 제안을 한 것이지. 정말로 영일씨와 결혼할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인과 법적으로 이혼한 후에 저와 법적으로 혼인 신고를 하고 영주권을 받은 후에 이혼하면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에 드린 말씀인데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수지 씨!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저와 결혼하자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위장결혼을 하는 셈인데 수지 씨에게는 어떤 이득이 있다고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제게 차 한대만 사주시면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자동차는 꼭 새차가 아니라도 상관 없습니다. 지금 제가 타고 다니는 차가 고장이 잦아서 그러니까 이삼년 된 일제 중고차 정도면 괜찮습니다.”